1820년 봄, 제임스 몬로(JAMES MONROE) 대통령은 어려운 결정에 직면했습니다. 그의 첫 4년 임기는 마지막이 닥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선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선거인단이 다른 후보를 내세울수밖에 없는 상황을 가져올수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북부와 남부 출신 의원들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뒤를 이어 의회는 루이지애나 통치령(LOUISIANA TERRITORY)의 일부인 미조리(MISSOURI) 를주로 승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남부의 의원들은 미조리주의 노예제도가 허용되기를 원했습니다. 북부 의원들은 이를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타협안이 나왔습니다. 즉 미조리는 노예를 유지할수 있으나 루이지애나 통치령의 다른 북부 지역에서는 노예가 허용될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남부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이 타협안은 통치령의 많은 지역에 노예가 들어올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남부인들도 새로운 통치령에 정착할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몬로 대통령도 노예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남부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타협안을 거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몬로 대통령은 타협안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루이지애나 통치령에 노예를 허용치 않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몬로 대통령은 헌법이 국회에 그같은 권한을 부여하지 않은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몬로 대통령은 자신이 타협안을 승인할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비토 멧세지까지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강한 감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만약 자신이 이를 거부하면 내전이 벌어질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몬로 대통령은 결국 타협안에 서명했습니다. 드디어 미조리는 노예 허용주로써 연방에 가입됐습니다.

이로써 위기는 넘긴듯 했습니다. 그러나 두어달후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미조리는 주 헌법을 제정한 다음 승인을 받기위해 이를 연방 의회에 보냈습니다. 이 헌법은 흑인 남성이 미조리주로 유입되는 것을 허용치 않고 있었습니다.

이 법은 즉각 여러 의원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그것이 연방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헌법은 모든 주의 주민은 다른 주의 주민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명시돼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도 미조리주의 주민이 될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은 여러달 동안 계속됐습니다. 헨리 클레이 전 하원의장은 양측이 다 수용할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했습니다. 미조리가 이 법을 승인하는 경우에만, 주로 합병될수 있었습니다. 즉 미조리는 어떠한 다른주 주민의 권한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에 해당하는 이 타협안으로 미조리주와 루이지애나 통치령의 분규는 해소됐습니다.

1820년의 타협안은 그후 약 20년동안 노예 문제를 둘러싼 말썽을 잠재웠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그것이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 전 대통령은 타헙안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밤중의 화재경보처럼 이 문제는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공포로 가득차게 하고 있다. 나는 즉각 그것이 연방의 죽음이라는 위협으로 보았다. 이 싯점에서는 그 문제가 쉬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하다. 결코 최종 타결이 아니다” 타협안에 서명하기로한 몬로의 결정은 1820년 선거에서 그를 불리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는 사실상 단 하나의 정당, 즉 공화당만이 존재하는 셈이었으며, 그는 당의 총재였습니다. 야당인 연방당은 소멸됐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선거에서 위협이 되지 못했습니다.

1820년 선거에서는 몬로가 유일한 후보자였습니다. 그는 매주의 선거인단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뉴햄프셔(NEW HAMPSHIRE)의 윌리암 플루머는 죤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를 지지했습니다.

몬로의 첫 4년 동안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영토를 넓혔습니다. 훌로리다는 이제 미국의 영토가 됐습니다. 노예문제는 임시이기는 하지만 해결됐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하나인 경제 문제도 발생했으나 서서히 개선돼 가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성장했습니다. 성장하면서 지역에 따라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대체로 세 지역에서 극도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북부의 여러 주는 전국의 공업 중심지였습니다. 남부는 농업 중심지로써 대규모 농장에서 면화, 쌀, 담배등이 생산됐습니다. 이들 농장의 대부분 인력은 노예였습니다. 서부지역에는 작은 농장들이 있었으며 자유 노동자를 사용해 곡물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서부는 새로운 출발로 새 삶을 시작할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땅값은 쌌습니다. 땅주인의 노동은 그대로 그의 수입이 됐습니다.

이같은 지역적 이해 관계의 차이는 몬로 행정부의 1당 체제에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북부는 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입 상품에 대한 높은 세금을 부과하기 원했습니다. 이들 지역은 또 상품을 시장으로 내보내는데 필요한 도로와 수로를 만드데 드는 비용을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남부는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데 반대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물건값이 비싸질 것이었습니다. 외국 상품에 세금을 매기면 외국도 미국 남부의 면화와 담배에 세금을 매길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는데 정부가 지원을 해야한다는데도 남부 사람들은 반대했습니다. 대서양 연안 남부 주들을 통과하는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서부 주들은 정부가 도로와 운하 건설을 지원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오하이오(OHIO)강과 미시시피(MISSISSIPPI) 강을 이용하는 것은 비싼 수송료가 들지 않는 유일한 운송수단이었습니다. 서부는 외국 제품에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데도 동의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생산하는 곡물값도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역에 따라 이같이 다른 이해관계는 1824년 선거에서 매우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야기시켰습니다. 이들 세 지역은 최소한 한 후보씩을 내세웠습니다.

선거운동은 거의 몬로가 2차 임기를 시작한 직후부터 시작됐습니다. 한때는 16명의 인사들이 대통령 후보가 될 뜻을 내비쳤습니다. 1822년 그 수는 6명으로 줄었습니다. 그중 세명은 죤 퀸시 아담스 국무장관, 윌리암 크로포드 재무장관, 죤 칼훈 전쟁장관등 각료들이었습니다.

아담스는 유일한 북부 출신 후보였습니다. 제 2대 대통령 죤 아담스의 아들인 그는 여러가지 능력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정부내에서 그가 할수 없는 일이란 거의 없었으며, 일단 일을 하면 우수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냉정하고 따지기 좋아하고 말이 거칠었습니다.

크로포드 재무장관은 버지니아에서 출생한 남부 사람으로, 죠지아(GEORGIA)에 광대한 토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1816년 선거에서 공화당원들이 몬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을 당시, 일부 인사들은 그에게 표를 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우수한 정치인이었으며 남부 공화당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칼훈 전쟁장관도 남부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로포드보다 훨씬 지지율이 낮았습니다. 그의 고향인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 주는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했습니다.

서부에서는 1824년 선거에 두명의 후보가 등장했습니다. 한 사람은 서부의 해리(HARRY OF THE WEST) 라는 별명을 가진 켄터키주의 헨리클레이(HENRY CLAY)였습니다. 그는 변호사이며 하원의장을 역임하고 상원의원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늙은 히코리(OLD HICKORY)라고 불리우는 뉴오를리언즈 전쟁(BATTLE OF NEW ORLEANS DURING THE WAR OF 1812) 영웅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이었습니다. 잭슨은 교육을 별로 받은적이 없고 정부 운영에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으며, 극도로 다혈질이었습니다. 그는 투사였으며 사람들이 열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여섯번째 후보는 뉴욕의 듀위트 클린튼(DEWITT CLINTON)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주 주 지사였으며 에어리 운하(ERIE CANAL) 건설공사의 위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대통령 후보는 주 의회가 선정한 선거인단에 의해 결정하도록 돼있었으며 의회는 클린튼의 정적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은 희박했습니다.

선거가 실시되기 2년전에는 재무장관 크로포드가 뚜렷한 선두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1823년 가을 심한 질병으로 앓아 눕게 됐습니다. 그는 여러달 동안 각료들을 만날수가 없었으며 서류도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애써 사무실로 되돌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 빛났던 자신의 그림자로서 일터에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그의 걸음은 마치 맹인이 걷는것 처럼 느렸다고 어떤 기자는 전했습니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승리할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