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년의 미국 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휘그당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휘그당은 밴 뷰렌 대통령이 재임하려는 시도를 꺾고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휘그당 지도자들은 너무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앞서 후보로 선정했던 켄터키주의 헨리 클레이를 포기했습니다. 노예를 반대한 사람들은 노예소유주인 클레이를 반대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그가 사업체들과 이권에 개입돼 있었기 때문에 그의 후보 선정을 반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친 은행가라고 불렀습니다. 휘그당 지도자들은 또 앤드류 잭슨과 같은 군사 지도자를 후보로 물색해야 하는것으로 느꼈습니다. ,

뉴욕주 출신으로 휘그당의 주요한 지도자중 한명인 썰로우 위드(THURLOW WEED)는 국민이 1812년 전쟁 영웅 잭슨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위드는1836년 후보중 한사람이었던 윌리암 헨리 해리슨(WILLIAM HENRY HARRISON) 장군이 휘그당이 필요로 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리슨은 1811년 인티애나 통치령(INDIANA TERRITORY)에서 인디언의 공격을 물리친 인물이었습니다. 서부 지방 사람들은 티피카노(TIPPECANOE)라는 곳에서 벌어진 그 전투가 해리슨의 위대한 승리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위드는 캐나다와의 국경 문제를 조용히 해결한 윈필드 스카트(WINFIELD SCOTT)도 고려했습니다. 스카트는 버지니아 출신의 남부인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바 없고 정적도 없었습니다. 위드는 스카트가 해리슨이나 클레이보다 유리한 후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도자들은 해리슨이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1836년 선거에서 많은 표를 얻었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휘그당 전당대회가 열리자 클레이, 스카트, 해리슨 세 사람 모두 후보로 선정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전당대회 대표들은 결국 해리슨을 뽑았습니다.

부통령 후보로는 또 한사람의 남부인인 죤 타일러(JOHN TYLER)를 선정했습니다. 타일러는 주의 권한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클레이의 후보 선정을 위해 많은 애를 썼습니다. 어떤 보도는 그가 너무 열심히 노력한 나머지 클레이가 떨어지자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습니다. 남부의 휘그당원들은 타일러가 부통령 후보로 선정됐다는 이유만으로 해리슨을 지지했습니다.

클레이는 전당대회장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워싱턴에 머물면서 대회장으로부터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지막날 그는 기다리는 동안 술을 마시고 또 마셨습니다. 휘그당이 해리슨을 선정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그는 분노로 소리쳤습니다.

“나는 당의 역사상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다. 언제나 떨어질 것이 확실한 때에만 후보로 선정이 되고,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당선될수 있는 이제는 내가 후보로 선정이 되지 못했다.”

민주당은 휘그당이 클레이를 선정하지 않고 67세의 해리슨을 뽑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민주당은 해리슨을 ‘늙은 여인, OLD LADY’로 묘사했습니다. 이들은 또 해리슨을 해리슨 할아버지, GRANNY HARRISON이라 불렀습니다. 한 민주당 신문은 그 연로한 인물이 결코 대통령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서, 그가 진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연간 2천 달라가 되는 연금과 한통의 술, 그리고 통나무집일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노동하는 남성들은 사과주를 마셨으며 많은 농부들은 아직도 거치른 통나무로 지은 집이나 캐빈에서 살았습니다. 휘그당은 민주당의 그같은 비난을 자당을 위한 자료로 역용했습니다. 이들은 은행가와 기업가의 당이라는 이미지를 노동자와 소규모 자작농의 당으로 내세우는데 이를 이용했습니다.

“민주당의 말이 맞다. 휘그당은 술과 통나무집의 정당이다”라고 휘그당은 소리쳤습니다. 휘그당은 버지니아의 귀족인 해리슨을 평범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오하이오에 있는 그의 저택은 통나무집으로 변하고 그의 비단 모자는 농부들이 짠 모자로 교체됐습니다.

휘그당 지도자들은 해리슨이 많은 연설을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해리슨이 어떤 글도 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의 모든 서한은 그의 정치 보좌관들이 썼습니다. 해리슨이 어쩌다 공공장소에서 연설을 할때도 중요한 내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에 대해 연로한 해리슨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민주당은 1840년 5월, 발티모어에서 전당대회를 열었습니다. 밴 뷰렌이 다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습니다. 밴 뷰렌은 전당대회 참석 대의원 전원의 지지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대표들은 부통령 후보에 대해서만은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이들은 각 주가 부통령 호보를 결정하도록 일임했습니다.

이때의 선거는 미국 역사상 가장 거치른 것이었습니다. 두 정당은 자신들이 보통 사람들의 친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강구했습니다. 휘그당은 통나무집을 곳곳에 세우고 사과주를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이들은 수천명씩이 모이는 대규모 야외 집회를 열고 이들에게 식사와 음료를 제공했습니다. 이들은 깃발과 악대, 해리슨의 초상을 들고 퍼레이드와 시가행진을 벌였습니다. 많은 선거 운동의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노래는 해리슨이 인디언에 대해 용감하다고 찬양했습니다. 이들 노래는 또 해리슨이 보통 사람들의 어렵고 단순한 삶을 사랑한다고 찬양했습니다.

동시에 휘그당 선거운동가는 밴 뷰렌이 백악관에서 왕처럼 산다고 비난했습니다. 한 펜실바니아 출신 하원의원은 대통령을 격렬히 비난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문은 전국으로 뿌려졌습니다. 이 의원은 백악관이 궁전으로 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밴 뷰렌이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사용했던 것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며 금과 은으로 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는 또 백악관의 카페트는 발이 묻힐만큼 두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그는 밴 뷰렌이 비단옷을 입으며 마치 꽃과 같은 냄새가 나는 향수를 뿌린다고 꼬집었습니다.

밴뷰렌과 그의 민주당원들은 그같은 비난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민주당도 그에 못지 않은 어리석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들은 해리슨이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비하했습니다. 민주당은 해리슨이 개인 부채를 갚지도 않을 사람이며 심지어 백인을 노예로 팔아먹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헨리 클레이는 이 싸움이 통나무집과 궁전의 싸움, 사과주와 샴페인의 싸움이라고 묘사했습니다.

1840년 메인주에서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메인주 유권자들은 휘그당의 에드워드 켄트(EDWARD KENT)를 주 지사로 선출했습니다. 또 이들은 티피카노의 영웅 해리슨에게 선거인단 표를 몰아주었습니다.

다른 주들도 하나 하나 씩 선거를 치렀습니다. 초기부터 해리슨이 승리할 것이 확실한것 처럼 보였습니다. 총 투표수에서는 두 사람이 비슷한 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선거인단 수에서는 해리슨이 234표를 얻은 반면 밴 뷰렌은 60표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해리슨은 미국의 제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해리슨의 당선은 대부분 휘그당 지도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헨리 클레이와 다니엘 웹스터의 공이 컸습니다. 이들은 해리슨이 백아관에 들어간 후에도 그를 조종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해리슨은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간파했습니다. 1840년 말 해리슨은 클레이의 고향인 켄터키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클레이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는 클레이와 만남으로써 클레이에게 실권이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