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밴 뷰렌의 행정부 임기가 다 되어가면서 그가 강력한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그의 정책을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야당인 휘그당은 밴 뷰렌의 실패에 흡족해 했습니다. 휘그당은 다가오는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상원의 휘그당 원내총무는 캔터키주에서 온 헨리 클레이 (Henry Clay)였습니다. 클레이의 한 동료는 그가 휘그당 대선후보로 곧 지명될 것이 확실시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휘그당의 지도자는 그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대통령으로서 클레이의 능력을 문제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824년과 1832년 두 해에 후보자로 지명됐으나 그는 두번 모두 낙선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클레의의 지지기반을 잠식했던 점증하는 정치적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낙태를 찬성하는 세력이었는데 이들은 노예제 또한 반대했습니다. 낙태 찬성자들은 클레이가 노예를 소유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제에 대한 논쟁은 한동안 잠잠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830년대 노예제 논쟁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논쟁이 다시 제기된 주요한 원인은 면화 때문이었습니다. 면화 생산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했었습니다. 1830년대에 들어서 면화 재배자들은 노예제가 없이는 남부 경제체제 전체가 운영이 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면화 재배자들에게 노예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서, 생존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 되었습니다.

면화 재배는 농업에 주력했던 남부지역이 공업에 주력했던 북부지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북부지역의 선박은 남부의 면화를 유럽 시장으로 운반하였습니다. 남부지역이 필요로 했던 제조품들은 북부지역에서 왔습니다. 남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면화 재배에 기울여 다른 산업을 육성하는데는 소홀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남부 지도자들에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은 연방정부의 공익사업에 대한 재정적 보조금 대부분이 북부지역으로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입과세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또 벌어졌습니다. 수입품에 대한 과세는 대부분 북부지역의 제조업자들에게 이익이 되었습니다. 수입과세는 1842년에 낮추어지기로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시간이 어느정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때가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낙태찬성 운동가의 세력이 막 커지기 시작했을때의 미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았습니다.

노예 반대 운동은 종교 단체에 의해 조직됐습니다. 이들 단체 요원들은 악과의 타협이란 있을수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노예제도가 바로 악이며, 따라서 이는 사라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830년대는 뉴욕과 뉴 잉글랜드에서 노예반대 조직이 탄생한 시기였습니다. 이들 조직은 신문과 팜플렛을 발행했습니다. 이들은 전국에 이들 팜플렛과 노예반대 청원서를 배포했습니다.

남부는 이같은 팜플렛들이 경계선을 넘어 남쪽 주들로 오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습니다. 노예 반대 조직은 그같은 행동이 출판의 자유와 청원에 대한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이에 대응했습니다.

이것은 장기적이고 고통스러운 투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투쟁은 2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이것은 결국 연방을 남부와 북부로 갈라놓았습니다.

노예 반대 조직은 아직 북부에서도 커다란 지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북부인들은 이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1836년, 하원은 더 이상 노예 반대 청원을 듣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GAG RULE – 발언금지 규정" 으로 알려진 조치였습니다. 상원은 그같은 규정을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원도 노예반대 청원이 사실상 상원에 올라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하원의원으로 있던 죤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 전 대통령은 이에 항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노예반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발언 금지 규정을 반대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아담스는 그 규정이 의회에 청원을 하도록 한 헌법상의 권리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발언 금지규정은 수많은 북부인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노예반대운동을 지지하게 됐습니다.

노예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은 헨리 클레이 휘그당 대표를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만들었습니다. 클레이는 노예제도, 노예반대자 문제, 남부의 극단주의자들의 문제등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됐습니다. 클레이 상원의원은 자신도 약간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 제도를 혐오했습니다.

1833년 상원 연설에서 클레이는 노예제도를 ‘커다란 악, 우리 조국의 지도에 가장 어두운 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클레이는 노예제도에 관한 논쟁이 정치 지도자로서의 자신을 파멸시킬 것으로 우려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노예 분규가 국가를 파멸시킬수도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클레이는 연방제도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였습니다.

클레이는 폭력적인 행동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노예문제 해결에 있어 폭력보다는 국민 여론이 천천히 부각되는 것이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레이는 노예반대자들과 그들이 떠들썩하게 이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는 노예반대운동가들이 남부의 제도를 방해하고 있으며 노예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클레이는 또 노예문제에 관한 토론을 봉쇄한 남부 상원의원들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태도가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은 노예 반대자들과 똑같이 나쁘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상원은 노예문제를 일반적인 안건으로 토의했습니다. 그 내용은 연방정부가 노예 문제에 대해 어떠한 법적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해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주의 죤 칼훈 의원은 하나의 결의문을 상정했습니다. 이 결의문에서 칼훈 의원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연방은 각주의 합의에 의해 창설됐다. 각주는 자기 주의 전적인 운영에 관한 헌법상의 권리를 갖고 있다. 워싱턴 정부의 임무이자 할일은 그같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예문제에 관련, 각주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훈 의원은 워싱턴 DC와 통치령에 노예제도가 도입되자 유력한 입지를 확보했습니다. 칼훈 의원은 이러한 지역의 노예제도를 방해하는 연방이나 각주 또는 개인은 노예주들의 이익에 대한 직접적이고 위험한 공격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칼훈 의원은 남부는 노예제 폐지운동에 단 한걸음도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떠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클레이 상원의원은 각주의 권리에 대한 그런 극단주의적인 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각주들이 노예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연방에서 탈퇴하는 문제를 거론하자 클레이 의원은 아주 격노했습니다.

“분리란 끔찍한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 연방이 안전과 번영을 지속하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다른 연방은 필요없다. 일체의 분리 연맹과 파벌주의적인 협약에 반대한다. 우리 연방과 정부는 노예주들의 권리와 안전을 공격할 수 없다.”고 클레이 읜원은 말했습니다.

그리고나서 클레이 의원은 자신의 결의안을 상원에 상정했습니다. 이 결의문에서 클레이 의원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국회는 각주의 내부문제인 노예문제에 대한 어떠한 합법적인 권리도 없다. 따라서 노예제 폐지청원은 기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회는 노예문제를 다룰 어떤 한법상의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상원은 클레이 결의안을 승인하고, 칼훈 결의안을 부결시켰습니다.

클레이 의원은 이 논쟁을 해결하기를 원했고, 또 연방을 사랑했기 때문에 소신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또한 개인적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클레이 의원은 청원의 헌법적인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이것은 북부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국회가 열리기 전에 노예제 반대 청원과 같은 노예 폐지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합법적인 운동을 동원했습니다. 이것은 남부를 즐겁게 했습니다. 클레이 의원은 그의 국가적인 입장을 지켰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나는 남부나 북부에서 아무 것도 잃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했다.”고 말했습니다.

1840년 총선거가 끝나가자 야당인 휘그당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휘그당은 재선을 기도하는 반 뷰렌 대통령을 패배시켰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휘그당은 또한 헨리 클레이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던 계획을 포기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