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1814년 여름, 미국과 영국이 벨기에 겐트에서 평화회담을 개최한 데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평화 조약 동의에 시간을 끌었습니다. 영국은 그 해가 다갈 무렵 미국에서 몇 차례 전투를 벌일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투가 성공적일 경우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대로 조약을 승인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회담에 참석한 영국 대표들은 미국이 북서 통치령(Northwest Territory)의 관할권을 인디언들에게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메인(Maine)주의 일부분을 캐나다에 줄 것과 그 밖에 미국 국경의 여러 가지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전 대통령 존 아담스(John Adams)의 아들인 존 퀸시 아담스 (John Quincy Adams) 가 대표단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양측의 요구는 모두가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미국은 전쟁 중 입은 손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또 미국 선원들을 영국 해군에 강제징용(seizure)하는 행위를 중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캐나다 영토도 원했습니다.

영국 대표들은 미국인들을 영국 해군으로 강제징용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 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존 퀸시 아담스는 평화회담의 성공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영토의 어느 부분도 포기할 의향이 없었습니다. 전 대통령 존 아담스가 당시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에게 말했습니다: “미국 영토를 한 평 이라도 양보 하느니 차라리 나는 영원히 이 전쟁을 계속하겠네”

그의 아들 존 퀸시는 영국이 그들의 요구사항을 조금도 완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겐트 대화에 참석한 또 한명의 미국인, 헨리 클레이 하원의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영국군이 발티모어(Baltimore)와 플래츠버그(Plattsburg)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영국대표들과의 협상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그들은 미국에 대해 북서 영토를 인디언들에게 주라던 요구사항을 포기했습니다.

영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를 거둘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정부는 웰링톤 공작에게 캐나다에서 영국군을 지휘해 줄것을 부탁했습니다.

웰링톤 공작이 전에 나폴레옹을 상대로 커다란 승리를 거둔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미국과의 전투에서도 그와 같은 승리를 거둘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제 전쟁을 계속하든 평화를 찾든 모두 공작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웰링톤은 정부가 원한다면 미국에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승리를 약속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영국이 필요한 것은 새 장군이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국경 5대호의 제해권이라고 말했습니다. 웰링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제해권을 장악할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제가 미국에 가는 것이 아무런 도움도 안될 것입니다. 어쩌면 미국과 지금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영국이 미국정부로부터 영토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영국군이 전투에 실패함으로써 그러한 것을 요구할 자격을 갖지못하게 됐습니다. ”

영국 정부는 이같은 최고 군 전문가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겐트의 영국 대표단에게 미국 영토 요구를 포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곧 이어 미국도 캐나다 영토에 대한 요구를 포기했습니다.

1814년 성탄 하루 전, 미국과 영국은 하나의 조약에 서명 했습니다. 이 조약에서 양측은 전쟁을 중단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양측의 모든 분쟁들은 미래의 협상에서 해결키로 했습니다.

전쟁은 종료 됐습니다. 그러나 평화조약의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기도 전에 또 하나의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814년의 가을, 자마이카에서 영국 병사들은 미시시피 강 어귀로부터 뉴올리언즈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늦은 11월 약 7500명으로 구성된 이 군대는 자마이카에서 뉴올리언즈까지 항해 했습니다.

영국군대는 에드워드 파켄헴 (General Sir Edward Pakenham) 장군이 지휘했습니다. 파켄헴 장군은 군대를 바로 미시시피강 어귀로 진군시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강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항해를 했습니다.

12월 23일 이른 오후 뉴올리언즈에서 미국군대를 지휘하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 장군은 영국군대가 가까이 왔음을 인지했습니다.

잭슨 장군은 혁명전쟁 후 법을 공부한 훌륭한 군인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내쉬빌 테네시에 살았으며 연방 상하의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812년 전쟁이 시작됐을때 잭슨은 테네시의 지원병들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선정됐습니다. 그는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병사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습니다. 병사들은 잭슨을 “늙은 히코리나무”-old hickory”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히코리 나무처럼 거칠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잭슨은 연안을 지키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해 초에 그는 플로리다 동쪽의 펜사콜라(Pensacola)를 침공해 몇백명의 영국 해병들을 몰아냈습니다. 잭슨은 영국이 뉴올리언즈를 공격하기전 모빌(Mobile)에도 공격을 가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일부 군사력을 모빌에 남겨두고 그 외 일부 군대를 이끌고 미시시피 강 어귀로 갔습니다.

병든 잭슨이 뉴올리언즈에 이르러 그곳에서 알게된 사실은 그의 건강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될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영국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 태세는 형편없었습니다. 잭슨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요새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영국군들이 뉴올리언즈에 거의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잭슨이 접했을땐 요새 건설이 거의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잭슨은 영국군이 바로 아래 있다며 오늘밤 그들과 반드시 싸워야 한다고 부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영국병사들은 다음날 뉴올리언즈를 쉽게 손에 넣을수 있다고 믿으며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잭슨은 밤이 시작되자 총과 군사들을 서둘러 동원하여 무방비 상태의 영국군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미국병사들은 시 남쪽 약 8 킬로미터 지점으로 퇴각했습니다. 잭슨은 이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했습니다. 오른쪽에는 미시미피 강이, 왼쪽에는 진흙과 물이 어우러져 건널수 없는 늪이, 그리고 전방에는 공터가 있었습니다.

영국병사들은 2주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미군 방어 시설의 몇 군데를 공격하려 시험해봤으나 약점을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잭슨은 매일 병사들이 각 진지를 개선토록 했습니다. 밤이되면 소집단의 잭슨 병사들은 공터를 가로질러 다른 방향을 수비하던 영국군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1월 8일, 마침내 영국군의 공격은 시작됐습니다. 영국은 그러한 강한 공격에 미국이 달아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잭슨의 야포는 적군을 향해 발사됐습니다. 영국군대가 150미터 전방에 이르자 미군병사들은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빗발치는 총알과 포탄은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영국의 파켄헴 장군도 두 부위나 총탄을 맞은뒤 옆에서 터진 포탄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미국 방어진의 정상에 도달한 영국군 병사는 단 1명뿐이었습니다.

영국군은 마침내 2천명 이상의 부상자와 사망자를 내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포획된 영국 병사들의 수는 500명 가량이었습니다. 미국 군대의 사망자 수는 13명이었습니다. 미 합중국의 훌륭한 승리였으나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2주전에 조약을 통해 전쟁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뉴올리언즈 전투가 한창일 당시, 뉴잉글랜드 연방당원들은 전쟁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그리고 미국헌법 제정 계획을 논의 하고자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특별 회의를 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