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년이 저물어가면서 토미스 제퍼슨은 유럽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습니다. 이에 따라 어떠한 선박도 미국으로 들어올수 없으며 미국내 선박도 밖으로 나갈수 없게 됐습니다. 이같은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막자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미국 무역업자, 선박업주, 선원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이야말로 무역 금지를 가장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선박과 상품을 압수당하는 위험이 있더라도 무역을 계속하기 원했습니다. 이들은 무역을 하지 않고는 돈을 벌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즉각 제퍼슨의 정당인 공화당과 야당인 연방당의 정치 싸움으로 비화했습니다.

연방당 신문들은 제퍼슨을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무역 봉쇄가 나폴레옹을 돕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제퍼슨을 프랑스의 ‘도구’라고 비꼬았습니다. 한 연방당 소속 상원의원은 무역 봉쇄를 비난하는 팜플렛을 만들어 돌렸습니다. 그는 미국 동북부 주들에게 무역 봉쇄를 거부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그는 이같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워싱턴에 파견된 영국 관리를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그는 영국 관리에게 토마스 제퍼슨이 무역 봉쇄로 인해 대통령 직에서 퇴출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연방당은 의회가 무역 봉쇄를 중단시키도록 많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역 봉쇄가 최선의 방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미국이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퍼슨은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제퍼슨의 경제 정책은 2차 임기동안 많은 진전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정부의 빚을 대부분 상환하면서도 세금을 줄일수 있었습니다. 그는 전국에 걸쳐 통신과 교통의 발달을 위한 여러가지 사업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는 전쟁이 자신이 싸아놓은 업적을 모두 파괴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퍼슨은 무역 봉쇄가 가장 적절한 조치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제퍼슨은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현재로서는 무역 봉쇄가 전쟁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적절치 않을수도 있다. 만약 유럽에서 전쟁이 계속되고 영국과 프랑스가 계속 우리에게 적대적 행동을 취한다면, 그때 나는 의회가, 전쟁이 무역보다 나쁘지 않다고 말하게 하겠다.”

제퍼슨은 미국과의 무역 손실로 프랑스와 영국이 대미 정책을 수정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는 미국인들이 장기적인 무역 봉쇄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같은 변화가 빨리 오기를 바랐습니다.

뉴욕을 방문한 영국의 한 여행객은 무역 봉쇄가 가져온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항구는 선박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모든 선박은 닫혀있다. 불과 한두명의 선원만이 눈에 띤다. 여러 사무소들도 문을 닫고 있다. 커피집은 거의 텅 비어있다. 바닷가의 거리는 거의 폐허가 됐다. 하역장에는 풀이 돋아나고 있다.” 미국 북부의 공업주들은 무역 봉쇄로 가장 심한 타격을 느꼈습니다. 부유한 남부의 농장주들도 갑자기 자기들이 가난해진 것을 감지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담배가 가장 큰 수익원이었으며, 영국이 최대의 담배 수입국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역 봉쇄로 담배값은 폭락했습니다. 밀 값은 1 부쉘에 2달라에서 불과 7센트로 떨어졌습니다. 좋은 농토도 거의 값이 없을 정도로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무역 봉쇄에 대한 반대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반대는 동북부에서 일어났습니다. 선주들과 무역 업자들은 무역 봉쇄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비밀리에 수출을 계속했습니다.

어떤 무역업자들은 상품을 카나다로 보낸 다음 영국으로 수출했습니다. 의회는 이같은 무역 관행도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러나 수출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규정을 위반하면서 큰 돈을 노리고 영국과의 비밀 무역을 강행했습니다.

1808년 알버트 갈라틴(Albert Gallatin) 재무장관은 무역 봉쇄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었습니다. 갈라틴 장관은 제퍼슨 대통령에게 ‘무역 봉쇄는 어떤 형태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선박들이 출항을 함으로써 공공연히 규정을 위반하고 있어 실패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제퍼슨의 보좌관은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무역 금지가 계속되고 국민들이 이를 준수할수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실현될수 없다면 , 그리고 국민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목적을 달성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돼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여전히 자신의 정책을 변경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의회에서 발표한 연두교서를 통해 그는 국가의 밝은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무역 봉쇄 이전에는 수입되던 물건들이 이제는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는 국가의 부채가 거의 청산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국가를 방어하기에 충분한 100척 이상의 군함이 건조됐다고 말했습니다.

제퍼슨은 무역 봉쇄에 대한 반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로인해 발생한 심각한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가 여전히 미국의 중립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무역 봉쇄는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이에 대해 확신을 갖지못했습니다. 의회는 무역 봉쇄를 해제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토의했습니다. 야당인 연방당은 이 문제를 이용해 동북부 지방에서 당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회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1808년은 대통령 선거의 해였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두번째 임기를 마쳐가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3차 임기를 금지하는 법 규정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퍼슨 대통령은 오래전에 두번 이상은 대통령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같은 제한이 없으면 강력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대로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할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2차 연임을 한다음 물러났습니다. 제퍼슨 대통령도 그와 같이 했습니다.

제퍼슨 소속의 공화당원 3명, 즉 국무장관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대통령 특별 고문을 지낸 제임스 몬로(James Monroe), 제퍼슨의 2차 임기중 부통령을 지낸 죠지 클린튼(George Clinton)등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습니다.

공화당은 매디슨을 대통령 후보로 공천했습니다. 또한 클린튼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연방당은 4년전에 내세었던 후보들을 그대로 다시 출마시켰습니다. 챨스 코트워쓰 핑크니(Charles Cotesworth Pinckney)를 대통령 후보로, 루퍼스 킹(Rufus King)을 부통령 후보로 공천했습니다. 연방당은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퍼슨 대통령의 무역 봉쇄가 유권자들을 분노케하고 공화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일부 공화당원들마져도 이번 선거는 당에 매우 불리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퍼슨 대통령은 침착했습니다. 제퍼슨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무역 봉쇄로 그가 노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공화당 후보에 표를 줄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제퍼슨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매디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입니다.

앞서 말한것처럼 의회는 제퍼슨이 임기를 마치기전 무역 문제를 해결하기 원했습니다. 1809년 초,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유럽 다른 나라와의 무역 금지는 해제됐습니다.

제퍼슨은 무역 봉쇄가 좀더 강력한 힘을 갖고 더 지속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쨋든 제퍼슨은 3월 1일 이 법에 서명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후, 15개월동안 계속됐던 무역 봉쇄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새 대통령을 맞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