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쉽게 재선됐습니다. 재선 임기 4년동안 토마스 제퍼슨은 여러가지 새로운 정책을 추진시켰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공화당 총재였습니다. 반대 정당은 연방당이었습니다. 제퍼슨은 1차 임기중 매우 좋은 정책 수행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여러가지 세금을 없앴으며 정부의 부채를 갚았습니다. 그는 전쟁을 거치지 않고 루이지애나 테리토리라 부르는 광대한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했습니다. 연방당원들은 제퍼슨이 재선출마에서 쉽게 이기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압도적으로 승리할줄은 예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퍼슨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162표를 얻었습니다. 상대 후보인 챨스 코트워드 핑클리는 겨우 14표를 얻었습니다. 연방당은 핑클리가 적어도 40표는 얻을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제퍼슨은 연방당의 아성인 동북부 지방으로부터도 지지를 얻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토록 제퍼슨의 압도적 지지를 끌어냈는가? 이에 대해 전 대통령 죤 아담스의 아들 죤 퀸시 아담스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제퍼슨 행정부의 힘은 막강한 미국 일반 국민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대통령은 국민 대중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의 재선은 연방당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연방당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연방당을 복구하려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 될것이다. 그것은 마치 묻힌지 여러해가 되는 시신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것과 같다.”

1804년 선거가 끝나고 상원에 남아있는 연방당 소속 의원은 7명에 불과했습니다. 하원에는 25명만이 남아있었습니다. 연방당은 아직도 사법부는 장악하고 있었지만 의회에서는 세력을 잃었습니다. 사법부의 판사들중 여러명은 아담스 대통령 임기말 며칠 동안에 임명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제퍼슨을 반대했습니다. 어떤 판사들은 재판정을 제퍼슨의 정책을 비판하는 장소로 이용했습니다. 판사는 재판정에서 정치적 연설을 하지 못하도록 돼있었습니다. 가장 강력한 제퍼슨 반대 판사로 사무엘 체이스(Samuel Chase) 대법관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체이스는 메릴랜드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지방 정치와 전국 정치에 몸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독립 전쟁을 전후해 신생국 미국을 운영했던 대륙 회의의 대표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미국 헌법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메릴랜드주의 헌법 비준 표결때 그는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사무엘 체이스는 공화 체제를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미국인들이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는데 반대했습니다. 예를들면 모든 국민이 투표권을 갖는 것을 그는 반대했습니다. 그는 이같은 제도가 폭도들에 의해 나라를 좌우하게 만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교육받고 토지를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보통 사람들에게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면 정부에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체이스의 주장을 들었습니다. 제퍼슨은 한 국회의원에게 이는 염려스러운 일이라고 말습니다. 제퍼슨은 우리의 헌법 정신을 공격하는 행위가 처벌되지 않고 방치돼야 하는지 묻고, 국민은 그를 저지하는 모종의 조치를 국회가 취해주기를 기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퍼슨의 1차 임기 마지막 몇개월 동안 하원은 체이스 판사를 해임하는 문제를 논의한바 있습니다.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위원회는 그를 상원에 소환해 심문을 해야 할만한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원 전체 회의도 그같은 결론을 지지했습니다. 1805년 2월, 그에 대한 탄핵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탄핵 재판의 재판장은 부통령이자 상원 의장인 아론 버(Aaron Burr)였습니다. 버는 어떤 증거를 심문에 제시할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결정은 최종 재판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수 있었습니다. 연방당과 공화당은 재판 도중 버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했습니다. 양측은 모두 버가 자기들에게 유리한 조치를 취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버는 어느쪽에도 편향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버의 조치에 비판을 할수 없었습니다.

상원은 3주가 약간 넘는 기간동안 탄핵 심사를 열었습니다. 그 다음 체이스에게 가해진 8건의 혐의에 대해 표결을 실시했습니다.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면 상원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탄핵은 무위로 끝났습니다. 따라서 체이스는 대법관직에서 해임되지 않았습니다. 제퍼슨 대통령은 체이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상원 탄핵 재판이 있은 다음 체이스는 더 이상 재판정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탄핵 재판이 끝난지 며칠후 토마스 제퍼슨은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했습니다. 당시에는 1월이 아니라 3월에 대통령이 취임했습니다. 아론 버는 더 이상 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공화당은 그에게 부통령 후보 지명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대신 뉴욕주 지사였던 죠지 클린튼이 부통령이 됐습니다.

부통령 자리를 떠나기전 아론 버는 상원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습니다. 상원은 아론 버의 연설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정적들 마져 주의깊게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버는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어쩌면 다시는 자기를 볼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이 자유와 사회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함께 뭉칠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상원이 자유와 법, 그리고 헌법을 수호하는 지대한 책임을 맡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만약 헌법이 파괴된다면 상원 회의장인 바로 이 자리도 숨이 끊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론 버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 권력을 상실했으며, 많은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갈수가 없었습니다. 권총 결투끝에 알렉산더 해밀턴이 사망하게 되자 그는 형사범으로 기소될 위기에 빠져있었습니다. 1805년 3월 말, 버는 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흘이나 12일쯤후 나는 서부로 갈것이다. 나는 뉴 오를리언즈로 갈것이지만, 그보다 더 멀리 갈수도 있다” 그는 또 사위한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은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뉴욕에 가면 자유를 잃을 것이며, 뉴저지에 가면 교수형에 처해질 수도 있기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론 버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일년 이상 그는 비밀 구상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에 따라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 계획이 스페인으로부터 멕시코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버는 그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숨길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두 사람과 함께 그 일을 추진했습니다. 한사람은 전 상원의원 죠나탄 데이튼(Jonathan Dayton)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루이지애나 테리토리의 군인 총독 제임스 윌킨슨(James Wilkinson)이었습니다.

버는 돈도 필요했습니다. 그는 일부의 돈을 사위한테서 빌렸습니다. 오하이오에 사는 허만 블레너하쎄트 라는 사람한테서도 돈을 빌렸습니다. 블레너하쎄트는 아일랜드에서 건너와 많은 돈을 번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들은 버가 영국으로부터도 도움을 받기 원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버는 미국 주재 영국 대사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자금과 선박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새로운 국가는 아메리카 서부와 멕시코를 포함하는 지역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 서부의 주들은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떨어져 나가게 돼있었습니다.

영국 대사는 버의 구상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버에게 자신이 본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국 정부와 대화를 하는데는 4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버는 그토록 오래 기다릴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버의 신생국 건설 구상 이야기는 다음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