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퍼슨 대통령이 제출한 세금 삭감과 판사수 감축안은 의회에서 통과됐습니다. 의회는 전임 대통령 죤 아담스 임기말에 사법부 법을 통과시켰었습니다. 그법은 아담스 대통령에게 원하는 수만큼 얼마든지 판사를 임명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연방당이 정부의 3부중 하나를 장악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연방당은 의회 선거와 대통령 선거 모두에서 공화당과 토마스 제퍼슨에게 패했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은 그 법의 통과후 즉각 새로운 법원을 만들고 판사를 임명했습니다. 상원도 즉각 그같은 조치를 승인했습니다. 승인된 서류는 서둘러 서명됐습니다. 그러나 일부 판사들은 제퍼슨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 그같은 서류나 임명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은 그런 사람들에게 임명장을 주기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거부당한 사람중 한사람이 윌리암 마베리(William Marbury)였습니다. 그는 대법원에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대법원장은 죤 마샬이었습니다. 마샬은 공화당에게 마베리에 대한 임명장을 주라고 공화당 정부에 명령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한 그는 태도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그런 조치는 대법원의 영향력을 약화시킬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샬은 대법원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대통령이 서명한 법을 거부할 권한을 가진 것으로 믿었습니다. 마베리 케이스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현실화 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마샬은 자신의 결심을 조심스럽게 글로 썼습니다. 그는 먼저 마베리가 판사로 임명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권리를 부인당했다고 마샬은 지적하고 대통령을 포함해 누구도 어떤 개인의 권리를 빼앗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샬 대법원장은 이어 마베리가 1789 통과된 법에 근거해 자신의 케이스를 대법원에 제소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법은 모든 사람은 정부 기관이나 하급 법원의 결정에 대해 다시 심사를 해주도록 상급 법원에 요청할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샬은 헌법이 대법원의 권한을 매우 신중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대법원은 외교관과 다른 나라가 관련된 직접적인 요청을 청취할 수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법원은 하급법원의 판결이 나올때까지 다른 소송 사건을 판결할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샬은 1789년 법이 마베리 케이스를 대법원에 직접 제소할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헌법은 지상 최고의 법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그 아래법인 의회법은 헌법에 위배되며 아무런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샬 대법원장은 자신이 원하던 모든 것을 성취했습니다. 그는 마베리가 판사로 임명될 권리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마샬은 행정부와의 다툼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법원이 의회에서 통과된 법에 대해 판결을 내릴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 점입니다. 제퍼슨은 마샬 대법원장의 결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샬에 동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제퍼슨은 대법원이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제퍼슨 재임중 연방당은 여러차례 공화당 정부가 헌법에 위배되는 법들을 통과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연방당은 한번도 대법원에 그같은 법을 거부하라고 요구한적은 없었습니다.

제퍼슨의 첫 임기동안 미국은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프랑스는 스페인과 비밀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은 미국의 광대한 영토, 즉 루이지아나 테리토리(Louisiana Territory)로 불리우는 지역을 프랑스가 통치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나폴레옹이 미국에 손을 뻗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가 신대륙에 존재한다면 미국의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퍼슨은 프랑스 관할 지역을 돈을 주고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제퍼슨은 제임스 몬로(James Monroe)를 특별 협상대표로 프랑스에 보냈습니다. 프랑스로 가기전 몬로는 제퍼슨 대통령과 제임스 매디슨 국무장관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프랑스가 제시할수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것인지를 논의했습니다.

첫째, 프랑스가 매각할 의사를 비치고 있는 미시시피강 동부의 모든 땅을 사도록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프랑스가 그것을 거부하면, 몬로는 미시시피강의 하구 지역의 구입을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그 지역은 커다란 항구를 만들기에 충분한 넓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몬로는 미국의 제안을 내놓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미 대륙에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미국에 팔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재무장관에게 루이지애나의 모든 땅을 넘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부채를 청산할 돈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제임스 몬로는 기쁜 마음으로 루이지애나 매입 협상을 추진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는 미시시피 강 유역과 여러 지류의 유역을 8천만 달라에 미국 소유로 넘긴다는 데 합의했습니다.

동북부의 연방당원들은 그같은 매입을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그같은 매입으로 자기들의 주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연방당 지도자들은 동북부 여러주를 관할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뉴욕주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부통령인 아론 버는 뉴욕의 정치 지도자였으며 뉴욕 주지사 후보이기도 했습니다. 연방당은 버가 선거에서 승리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지원해 줄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연방당의 알렉산더 해밀턴은 버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오랜 정적이었습니다.

해밀턴은 뉴욕주 선거에서 버를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그같은 비난은 그뒤 여러 신문에도 게재됐습니다. 버는 뉴욕주 선거에서 패했습니다. 이에 따라 동북부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던 연방당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선거가 끝난후 버는 해밀턴에게 자신을 비난한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해밀턴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비난전을 계속했습니다. 버는 해밀턴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해밀턴이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습니다. 버는 결투를 요구했습니다.

결투는 보통 권총 대결을 의미했습니다. 당시에는 종종 신사가 자신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으로 권총 대결을 감행했습니다. 해밀턴은 결투를 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해밀턴은 그의 아들이 결투로 사망한 아픈 기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1804년 7월 11일 버와 결투를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들은 뉴욕시 허드슨 강 바로 건너편 위호켄(Weehawken)에서 만났습니다. 결투는 허드슨 강변 바위 절벽아래서 벌어졌습니다.

두 사람은 권총에 실탄을 장진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위치에 섰습니다. 해밀턴의 친구 한사람이 규칙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 준비됐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는 발사 신호를 내렸습니다. 두발의 총알이 공기를 찌르고 날아갔습니다. 해밀턴은 발끝으로 일어서다가 다시 쓰러졌습니다. 버는 그대로 서있었습니다.

버는 해밀턴을 유감스런 눈으로 내려다 본 다음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해밀턴은 다음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전국의 신문들이 일제히 해밀턴의 죽음을 보도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조용히 그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오랜 개인적 분규가 가져다준 서글픈 종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버의 정적들은 그를 살인자로 몰아세웠습니다. 부통령인 버는 남부인 죠지아주로 도피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2개월후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었습니다. 공화당은 다시 한번 제퍼슨을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아론 버를 다시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는데는 반대했습니다. 대신 죠지 클린튼이 부통령 후보로 추대됐습니다. 죠지 클린튼은 뉴욕주 지사를 7차례나 역임한 인물이었습니다. 연방당은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챨스 콧스워드 핑크니를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부통령 후보에는 뉴욕의 루퍼스 킹(Rufus King)을 내세웠습니다.

선거운동은 평온했습니다. 당시 후보들은 그다지 많은 연설을 하지 않았습니다. 공화당 유인물들은 제퍼슨 대통령의 첫 임기 4년 동안의 발전을 강조했습니다. 공화당은 연방당 시절에 세금이 늘어났었으며 제퍼슨 대통령이 그중 많은 항목들을 폐지했음을 부각시켰습니다. 연방당은 수백만 달라를 차용했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전혀 차용이 없었습니다. 또한 제퍼슨은 전쟁을 거치지 않고 루이지애나 테리토리를 차지했습니다.

연방당은 이러한 사실들을 부인할수 없었습니다. 연방당원들은 제퍼슨이 재선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후보가 선거인단의 40표를 확보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연방당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퍼슨은 162표를 얻은 반면 핑크니는 겨우 14표를 얻는데 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차기 대통령으로 재선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