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 지도하는 연방당은 많은 권한을 가진 대통령과 사법부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 정부를 만들기 원했습니다. 연방당원들은 권력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된다고 갱각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1790년대에 그렇게 했습니다. 연방당은 의회를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죠지 워싱턴에게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이 지도하는 공화당은 무제한적 권한을 가진 중앙 정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공화당원들은 권력이 전국에 고루 퍼져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양당 지도자들은 신문을 통해 설전을 벌였습니다. 역사가들은 해밀턴이 연방당 편에 선것으로 보이는 신문에 대부분의 글을 게재했습니다. 제퍼슨은 거의 모든 글을 공화당측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양측 신문들은 상대방을 비방하는 무기명으로 된 글들을 실었습니다. 이들 신문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도 실었습니다. 때때로 그러한 글에는 인신 공격성 내용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 두 장관이 그러한 싸움을 하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에 서있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1차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제퍼슨으로부터 사직서를 받았습니다. 제퍼슨은 행정부의 대부분 정책과 외교 정책에 대해 자신의 의견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해밀턴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워싱턴은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정책을 주로 입안한 사람이 바로 해밀턴이었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두사람 사이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워싱턴은 두 사람 모두를 좋아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의 재능이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분규는 이미 너무 심화돼 있었습니다. 이는 더 이상 두 사람의 견해차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완전히 서로 다른 정부 운영 철학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제퍼슨과 해밀턴의 화해를 도모하려던 워싱턴의 노력은 좌절됐습니다. 제퍼슨은 사임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제퍼슨은 자신의 딸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에 대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바뀔 것같지 않던 나의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남아서 계속 투쟁해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정당의 창설은 미국에서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정당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 규정된 법이 없었습니다. 정부 관리들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도 아무런 규제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제퍼슨은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도록 선거운동을 펼쳤습니다. 제퍼슨은 그것만이 해밀턴에 대적할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전국 총선거는 1792년으로 정해졌습니다.

국가의 최고 직책인 대통령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었습니다. 1792년, 누구나 죠지 워싱턴이 다시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공화당원들은 죤 아담스가 다시 부통령이 돼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담스는 애국자였고 누구 못지않게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화당원들에게는 연방당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해밀턴의 재정 정책은 은행가와 투자가들에게 모든 거래에 투자를 할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무부의 고위 관리로부터 정보를 얻어 투자를 했습니다. 그의 투자는 실패했고 사업은 망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사업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경제의 중심인 뉴욕에서는 금융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연방당은 북동부에서 강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은 전국적으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1792년 선거에서 공화당은 하원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공화당은 부통령을 교체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부통령은 다시 한번 연방당인 죤 아담스에게 돌아갔습니다. 아담스가 재선된 것은 많은 미국인들이 ‘워싱턴 대통령은 아담스를 원한다’고 믿었던데 요인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스는 확고한 승리를 하지는 못했습니다. 4개주의 선거인단은 공화당인 뉴욕의 죠지 클린튼을 지지했습니다. 한 주는 후보로 나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토마스 제퍼슨에게 표를 주었습니다.

1793년, 알렉산더 해밀턴의 정치력에 변화가 왔습니다.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에서 해밀턴에게 그의 재정 문제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왜 행정부는 의회에 자금 차용 계획, 대출 계획, 세금 징수 계획등에 관한 사실을 통보하기 거부하는가’ 가 문제였습니다.

4년에 걸쳐 하원은 해밀턴이 요구하는 법안에 대해 그 법이 왜 필요한지 묻지도 않고 통과를 해주었습니다. 해밀턴에 따르면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정부가 일을 할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원은 좀더 많은 내용을 알기 원했습니다.

해밀턴은 그같은 요구를 모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질문에 답변했습니다. 그는 재무부의 활동에 관한 네건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공화당은 해밀턴과 그의 측근들이 부정직한 일은 하지 않았는지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부정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공화당은 그가 돈을 개인용도로 사용했다고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문제로 해밀턴을 공격했습니다. 공화당은 해밀턴이 외채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워싱턴 대통령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고 비난했습니다. 공화당은 해밀턴이 중앙은행에 지나치게 비싼 이자를 지불했다고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또 의회가 통과시킨 정부 돈의 사용에 관한 법률들을 해밀턴이 위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연방당 의원들은 그같은 비난에 응답했습니다. 이들은 공화당이 재무장관의 비리를 단 한건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해밀턴을 해임시키려던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스스로 물러나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온 일에 만족했습니다. 미국 정부가 수립된후 첫 5년동안 그는 누구보다도 많이 정책 수립의 기틀을 닦아 놓았습니다. 그는 젊은 미국이 앞으로도 계속 자신이 닦아놓은 정치적 아이디어로 운영될 것으로 믿었습니다. 해밀턴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뉴욕으로 갔습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중앙 은행 문제로 공화당과 연방당이 싸우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달랐습니다. 연방당원들은 프랑스 혁명을 반대했습니다. 이들은 혁명과정에서 나온 폭력과 왕과 왕비를 처형한 것을 비난했습니다. 이들은 영국과 보다 긴밀한 정치, 경제적 유대를 원했습니다. 반대로 공화당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그 혁명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보았고 그것은 자신들이 영국에 대항해 싸운것과 일치한다고 간주했습니다. 공화당은 영국을 미국의 우방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당시에도 영국은 미국과의 평화조약을 위반하면서 서부 지역에서 넓은 토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토착 인디언들에게 서부로 진출하는 백인을 죽이라 하고, 그에 대해 돈을 지불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여전히 미국 선박으로부터 선원들을 잡아다 영국 해군 병사로 이용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미국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럽의 국왕들이 새 프랑스 공화국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을때 미국의 입장은 더욱 악화됐습니다. 미국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이 조약은 프랑스가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지원을 하기로 돼있었습니다. 그러나 워싱턴 대통령은 미국이 유럽의 분규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워싱턴은 미국의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중립 선언은 연방당에게는 승리였습니다. 이들은 아직도 대통령에 대한 영향력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1796년 이후 이들의 세력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워싱턴 대통령의 2차 임기가 끝나는 해가 바로 1796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워싱턴은 2차 임기 후에는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 미국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정해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죠지 워싱턴은 2차 임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 후임자가 누가 될것인지가 큰 관심거리로 등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