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아무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정당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미국인들이 정치적으로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조직으로 만들어진 제도는 없었습니다. 죠지 워싱턴의 첫번째 임기동안 정치적 이견은 두개의 세력으로 분리되기 시작습니다. 하나는 연방당 즉 Federalist 라 불리웠습니다. 이 그룹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을 지도자로 내세웠습니다. 또 하나는 공화당(Republican)이라 불리웠습니다. 공화당의 지도자는 토마스 제퍼슨이었습니다. 두 그룹은 각기 자기 세력 지도자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습니다.

해밀턴과 연방당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과 사법부를 중심으로한 강력한 중앙 정부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은행가들과 기업가들을 돕는 정책을 지지했습니다. 연방당원들은 영국과의 긴밀한 정치적, 경제적 유대를 원했 습니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폭도들의 통치라며 반대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이 이끈 연방당은 과거의 연방주의자 집단과는 달랐습니다. 앞서의 연방주의자란 새로운 미국 헌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그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반 연방주의자, Anti-federalist라 불리웠습니다. 일부 앞서의 연방주의자들은 해밀턴 처럼 연방당원이 됐습니다. 이들의 힘은 막강했습니다. 이들은 죠지 워싱턴 재임중 의회를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죠지 워싱턴이 해밀턴을 신뢰한데 힘입어 대통령 마져도 거의 좌지우지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을 중심으로한 공화당은 정부를 수립한다는 점에서 헌법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헌법이 정부에 무제한적인 권한을 주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농민들과 소기업가들을 지원하는 정책을 지지했습니다. 이들은 민중이 왕을 몰아낸 프랑스 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인들을 위한 보다 많은 민주주의, 보다 많은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이들 두 그룹을 지휘한 인물들은 여러면에서 크게 달랐습니다. 귀족주의적 연방당원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서인도 제도의 결혼하지 않은 남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뉴욕주에 광대한 토지 를 소유한 부호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돈과 지위는 해밀턴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는 돈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주 공화당원인 토마스 제퍼슨은 알렉산더 해밀턴이 원했던 것을 이룰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쪽으로 영국의 귀족과 친척이 되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음식과 포도주와 책과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제퍼슨은 순진한 농민들과, 서부를 개척해 정착한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그들도 나라일에 참여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마스 제퍼슨은 모두 충성스런 미국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운영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달랐습니다. 이들의 개인적인 의견 차이는 워싱턴 대통령 행정부에서 일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자리에서 말다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신문을 통해서 논쟁을 계속했습니다.

두사람은 모두 언론의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퍼슨은 민주주의에서 언론은 매우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신문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알릴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느꼈습니다. 제퍼슨은 한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나에게 언론 없는 정부와, 정부 없는 언론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정부없는 언론을 택하겠다”

해밀턴은 이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언론을 이용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혁명 전쟁중 해밀턴은 죠지 워싱턴 장군의 부관으로 일하면서 군대를 위한 자금과 물자를 확보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해밀턴은 13개주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는 당시 힘이 없는 국회에도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두곳 모두에서 별로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해밀턴은 연방 조항에 의한 새로운 정부는 약하고 조직력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 정부가 강력한 권한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강력한 중앙 정부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연방은 분열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해밀턴은 그같은 생각을 여러 신문의 기고를 통해 주장했습니다. 그는 그러한 기고문에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고, 대륙 주의자(Continentalist)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얼마안가 그는 연방조항의 수정을 요구하는 회의를 개최해야 된다고 주창하는 강력한 인물이 됐습니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제헌회의가 열린 것은 바로 그러한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당시 해밀턴은 버지니아주의 대표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뒤 해밀턴은 여러건의 신문 기고를 통해 헌법의 통과를 가져오는데 공헌했습니다. 해밀턴이 사용한 신문은 Federalist Paper라 불리웠습니다. 이 신문에는 제임스 매디슨과 죤 제이가 함께 글을 썼습니다.

죠지 워싱턴 대통령 아래 재무장관이 됐을때도 그는 계속 신문을 이용했습니다. 그는 이제 정치적 목적만을 위해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그가 이용한 신문은 죤 페노(John Fenno)가 편집을 보고있는 Gazzete of the United States였습니다. 제퍼슨은 여러 신문에 기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지하는 신문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이미 그런 신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랜 친구 필립 프레노(Phillip Freneau)가 편집을 하는 National Gazzete였습니다.

해밀턴을 지지하는 대부분 사람들은 북동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은행가들이었고 기업가들이었습니다. 변호사, 의사, 그리고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제퍼슨은 해밀턴의 정치적 힘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밀턴이 보통 사람들로 이루어진 전국적인 조직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1790년대 미국인의 90%는 농민, 노동자, 소기업 소유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언제나 은행가, 대 지주, 부유한 기업가들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데 매우 불만스러워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대변해줄 정치적 조직이 없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바로 이들에게 손을 뻗쳐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퍼슨의 목표는 거대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미국인들은 대부분 자기들이 사는 지역 이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못했습니다. 이들중 많은 사람들은 재산이 없어 투표권도 갖지 못했습니다. 제퍼슨은 각주의 이같은 상황을 살폈습니다. 그는 거의 어디에서나 지방의 정치 단체들은 부자들만을 위한 주 법에 대항해 투쟁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퍼슨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들 지방 단체들이 전국적인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질때 연방당은 일종의 조직적인 반대 세력에 부딛칠 것이었습니다. 제퍼슨의 정당은 부유한자와 가난한자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연방당이 중앙 정부에서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믿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뭉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