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대륙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1776년 7월 4일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습니다. 새로운 나라는 아메리카 합중국, 즉 United States of America로 이름지어졌습니다. 새 나라 미국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전 식민지 사람들 모두가 그같은 결정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미국인들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국에 충성하는지 확실히 알수 없었습니다. 매사츄셋즈 정치 지도자였던 죤 아담스(John Adams)는 약 33%의 미국인들이 독립을 찬성하고 33%는 영국 지지, 그리고 나머지 33%는 이쪽도 저쪽도 아닐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약 20%의 미국인들이 영국을 지지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어느쪽이 됐건 이기는 쪽편에 서려는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역사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당시 아메리카인들중 영국을 위해 싸운 숫자는 3만명이나 됐습니다. 그외에도 아메리카 식민지군의 동태를 영국군에게 알려줌으로써 영국을 도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영국을 도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영국왕으로부터 벼슬을 얻은 사람들, 영국 국교인 앵글리칸 쳐치의 종교 지도자, 그리고 여국과 밀접한 사업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수 그룹들중 많은 사람들도 현지의 다수 주민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야 했음으로 영국에 충성했습니다. 또 ㄷ다른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해서, 또는 독립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켜 주지 못할 것으로 여겨 영국에 충성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란이 필요할만큼 영국의 정책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영국과 같은 강력한 나라를 상대로 싸움을 해 이길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도 그같은 반란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대륙 회의는 전쟁이 시작되면 빠른 시일내에 인디언들과 화평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은 인디언과의 전쟁을 동시에 치러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미국 관리들은 정착민들에게 인디언 영역으로 들어가지 말도록 촉구했습니다. 어떤 지역의 인디언들은 미국편에 섰지만 많은 수는 영국편에 섰습니다. 그들은 영국이 이길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쟁이야말로 식민지인들을 미국땅에서 물러가게 할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인디언들은 간혹 영국군 편에서 함께 싸우기도 했으나, 영국군이 질것처럼 보이면 떠나버리곤 했습니다. 영국군 편에서 싸운다는 것은 오판이라는 것이 들어났습니다. 전쟁이 끝난뒤 아메리카 군대는 인디언에게 빚을 진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흑인 노예들도 미국 혁명에서 어느편에 서야 할지 의견이 달랐습니다. 수천명의 흑인들은 영국편을 들어 싸웠습니다.

영국은 영국 해군이나 육군에서 싸워주면 자유를 주겠다고 제의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측에서도 싸움에 가담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흑인들에게 제의했습니다. 실제로 자유를 얻은 수백명의 흑인들이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많은 흑인들은 그러나 자유를 얻을 가능성은 영국쪽에 더 있다고 느꼈습니다. 상세하고 정확한 내용은 알수 없지만 역사가들은 북쪽에 살던 흑인들이 남쪽 흑인들보다 더 영국편에 많이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 군대에 합류해 싸운 흑인들은 5천여명에 달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였고, 주인이 자신들을 싸움터로 내보냈거나, 주인 아들을 대신해 전쟁터에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어떤 흑인들은 자유를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는 그 자유를 흑인들에게도 공유하도록 해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남쪽에서는 많은 주인들이 노예들을 집에 남겨두었습니다. 흑인들이 싸움터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전쟁이 격화되면서 모든 남성들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들은 싸움 대신 수레를 몰고 군수 물자를 실어 날랐습니다. 많은 흑인들은 미국 해군에 들어가 싸웠습니다. 식민지 육군이나 해군에 들어가 싸운 흑인들은 백인들로부터 분리돼 싸우지 않았습니다.

미국 혁명 전쟁에서 흑인들은 백인들과 어깨를 나란이 해 싸웠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대부분의 흑인 노예들은 전쟁중에도 그들이 늘 해오던 일, 즉 주인의 농장에 들어가 일을 하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아메리카의 혁명인들은 자신들을 애국자라는 의미로 패트리어트(Patriot)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영국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왕당파라는 의미로 토리(Tory)라고 불렀습니다.

패트리어트들은 전쟁 비용을 대기위해 흔히 토리의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이들은 군대를 위한 노무자로 토리의 노예들을 납치했습니다. 일부 토리들은 평생 살아오던 마을레서 쫓겨났습니다. 또 일부는 고문을 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뉴저지에서는 토리와 패트리어트들이 총을 쏘며 싸우고 간혹 상대방의 저택과 농장에 불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미국 혁명이 사실상 최초의 내전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혁명은 많은 가정을 분열시켰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벤자민 프랭클린 가족일 것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습니다.

그의 아들 윌리암 프랭클린은 뉴저지 주 지사였습니다. 윌리암은 영국왕을 지지했습니다. 전쟁에 관한 정치적 사고의 차이로 아버지와 아들은 그후 영영 결별하고 말았습니다.

패트리어트들 사이에서도 전쟁에 대한 생각이 달랐습니다. 식민지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단일 국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공동 노력하는 각각 별개의 주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매사츄셋즈 주에서는 펜실바니아를 괴상한 사람들로 가득찬 괴상한 고장이라고 생각습니다. 남부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농장 지대 사람들은 해안선 일대 주민이나 도시 사람들과 좀처럼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대륙 회의가, 여러 주에 대해 싫어하는 것을 하라고 명령을 내릴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대륙회의는 또 각주에게 전쟁 비용을 조달하도록 명령하지 못하고 다만 도와 달라고 요청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혁명군 총사령관 죠지 워싱턴 장군은 청년들을 군인으로 징집할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각 주들이 병력을 보내주도록 기다리는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가들은 죠지 워싱턴이 전쟁 내내 13개주와 대륙회의가 자신을 지지하도록 유도한 훌륭한 정치가였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합니다.

아메리카인들이 전쟁에 의견 일치를 보지못하고 있는 가운데 영국 사람들도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하자는 정부 결정에 따랐습니다. 이들은 패트리어트들로부터 영국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메리카가 영국을 침공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식민지들이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놓아두는 것이 영국의 할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죠지 영국왕은 그렇게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눈으로부터 영국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는수밖에 없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어느쪽에 속하건 전쟁이 영국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영국 사업가들은 더 이상 미국과 교역을 할수 없을 것입니다. 가격은 올라가고 세금도 올라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해군에 입대해 싸워야 했습니다.

전쟁 초기 영국은 반란이 뉴 잉글랜드 지방의 소수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만 항복을 받고 통제를 할수 있게 된다면 다른 식민지들은 항복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영국은 허드슨 강 계곡을 장악함으로써 뉴 잉글랜드와 그외 지역을 분리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사라토가 전투에서 패하자 영국은 그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북쪽의 메인주에서 남쪽의 죠지아 주에 이르기까지 해안선의 대도시들을 점령하려는 작전으로 바꾸었습니다. 영국은 전쟁 기간 내내 뉴욕을 장악하고 가끔씩, 필라델피아와 챨스톤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그같은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영국은 전쟁을 하면서 많은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영국군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넓은 바다를 건너야 했습니다. 병력 증원이나 군수 물자 조달은 어려웠고 오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미국 해군은 바다에서 영국 함정을 공격하는 기술이 늘어났습니다.

식민지 군대에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대륙 회의는 돈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대륙회의는 죠지 워싱톤에게 필요한 물자를 대줄수도 없었습니다. 또 각 주는 흔히 그들이 보내야 할 물자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미국인들이 언제나 싸울 의지를 갖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인들은 군인으로써 충분한 훈련을 받지도 못했고 일년 정도밖에는 복무하지 않겠다고 약속들을 했습니다.

미국 혁명의 정치적 경제적 사태 변화는 영국과 미국에게만 우려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미국 혁명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반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