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최초의 VOA 파견 아나운서 장 기범 회고록 (방송 문화 2001-5/6)

 
워싱턴으로의 해외 파견 근무

1950년대에 ‘도미’라는 말은 신비 그 자체였다. 저개발국가 빈곤의 나라에서 공무로 2년간씩 해외 근무를 한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월급도 초청국가에서 부담하니 금상첨화였다. 이렇게 장기범은 우리 나라 방송사상 첫 케이스로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장기범은 1959년 8월 12일 부인과 함께 김포공항을 출발, 새 임지인 워싱턴으로 떠났다.

한국의 모습을 전하는 최초의 한국어 방송 시작 그 당시 ‘미국의 소리’는 미국 해외 정보국의 방송부로서 미국 정부를 대변하여 세계의 여러 지역에 있는 수많은 청취자들에게 객관적인 뉴스, 미국 정책에 관한 최신의 사실, 그리고 미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 방송은 장기범이 파견되었던 그 해, 76개의 송신기를 가진 방송망을 통하여 37개 국어로 24시간 동안 쉴새없이 온 지구를 향해서 방송되고 있었다. 이 ‘미국의 소리’ 방송의 한국어 프로그램은 극동으로 보낸 최초의 VOA방송 중의 하나였다. 한국으로 보낸 첫 프로그램은 1942년 2월 24일에 방송되었다. 그날 VOA 한국어 아나운서는 마이크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미국의 소리 방송입니다. ‘미국의 소리’는 최초의 방송을 한국에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진실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모토가 될 것입니다.”

장기범이 파견된 시기에 VOA의 한국어 방송은 30분물 2개를 방송하고 있었다. 오전 7시와 오후 10시 30분에 방송되었다. 아침방송의 처음 10분 동안은 KBS 제1방송에 의해서 중계방송 되고, 제2방송에서 아침방송 전부가 중계되었다. 이 중에는 한국 청취자들에게 특히 흥미있는 두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을 방문한 각계 각층의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터뷰 프로그램]과 다른 하나는 한국의 경제적 여러 면을 보도하는 [발전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앞의 프로그램은 토요일 아침에, 뒤 프로그램은 수요일 아침에 방송되었다. 장기범에게는 이 [발전에의 길]이라는 프로그램 내용이 못마땅한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아끼던 후배 아나운서 최세훈에게 조국애의 울분을 이렇게 항공엽서에 담았다.

“미스터 최, [한국의 약진상]이라고 해서 수원 어느 지구에 일만 오천 환을 들여 우물을 팠다는 기사를 번역하라고 해서 이곳의 한인들을 벌컥 뒤집어 놓았습니다… 민재호 선배의 말을 빌리면 우리 한국은 5천년 전부터 우물을 파서 먹었다구요…”

VOA는 한국어방송 아나운서를 채용했는데, 앞의 인용문에서 거론된 민재호 선배와 이계원 선배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두 분 모두 장기범의 아나운서 선배이자 상사였다. 두분이 아나운서 양벽을 이루었고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방송 과정을 앞뒤로 맡았다. 물론 이계원이 방송선배이다. 장기범은 이 두 선배에게서 아나운서의 훈도를 받았다고 직접 고백한 바도 있다. 이계원은 1951년 10월 13일 VOA초청을 받고 한국을 떠난 것으로 동아일보 기사에 나타나 있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는 이미 호, 민 양 아나운서가 있는 바 금번 이 아나운서의 참가로써 일층 청신 활발해질 것이며 왕년의 명 방송이 들려올 것이 기대된다.” (동아일보 1951.10.21) 이 기사에서 ‘호’는 미모의 경성방송국 여자 아나운서 호기수를, ‘민’은 민재호를 일컫는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이계원보다 민재호가 조금 앞서 VOA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구태여 ‘조금’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민재호는 서울중앙방송국 방송과장이었다. 그는 얼마 후 동경 소재의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국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보다 앞서 정착한 분은 황재경 목사였다. 그는 이미 1951년 3월 미국 정부로부터 미국에서 일평생을 살 수 있는 영주권을 부여받았다.

한국방송사상 최초의 해외 장기 파견 근무

장기범은 이 VOA 시절의 체험담을 신문 잡지에 쓴 적이 있는데, KBS가 방송 50주년을 맞아 펴낸 단행본 [한국 방송사]에 그가 기고한 내용은 방송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라 여겨진다. 그는 “흔히 필자(장기범)를 가리켜 VOA(미국의 소리) 방송에 최초로 파견되었던 아나운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VOA에 가기 이전에도 VOA 한국어 방송에 우리나라 사람이 참여하고 있었다”라고 전제하고 그 사람들의 VOA와의 인연을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황재경 목사의 사정을 비롯해 박경호가 미국 시찰 후 잔류한 점, 민재호가 한국전쟁 중에 VUNC를 거쳐 VOA에 참여항 경위, 이계원의 자청 케이스 등을 밝히고 있다.

장기범은 계속해서 “이와 같이 이미 여러분이 VOA에서 한국어 방송을 해 온 터에 유독 필자더러 최초로 VOA에 파견된 아나운서라고 가르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라고 자문하면서 그 해답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범의 이 글은 편집상 잘려 나가 다음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이 책자가 출간된 지도 이미 25년이 지났고 필자도 고인이 된 지 오래기 때문에 달리 알아볼 길이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가 주장하려는 바는 자신의 케이스는 미국 정부의 공식 초청이요, 국가 대 국가의 계약에 의한 공적 행위에 따른 것이며, 파견기간이 한정되어 계속 순환 교류근무가 가능하다는 점 등을 밝힌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따라서 그의 파견은 한국방송사에서 위탁교육이 아닌 최초의 순수한 파견근무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기간도 무려 2년 정도의 장기 체류였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을 위한 노력

장기범은 미국생활을 하면서 조국과 자신을 냉철히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는 우선 금주에 들어갔다. 애주가로 유명했던 그가 2년 동안 술울 거의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최세훈의 표현에 따르면 “황색 코리언인 자신을 냉철하게 응시했다”고 한다. 그는 현대의 낙원이 된 아메리카에서 찬란한 물질문명의 연원이 무엇인가를 천착하고 그 저류를 파헤치려는 노력을 부단히 추구했다. 그가 찾아간 1959년 여름의 워싱턴은 한국과는 극단의 상황이었다. 물론 고온의 기후, 일몰의 뒤바뀜은 그런 대로 세월이 지나면서 환경에 적응했지만 부자 나라의 문명은 그로 하여금 커다란 이질감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장기범은 “풍토며, 언어며, 모든 풍속이 생소한 곳에서 혼이 났습니다만은 기왕에 온 바에야 충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우선 그는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에 놀란다. 이처럼 자동차가 우리의 ‘신발’임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지만 무엇보다도 ‘남자가 장을 보는 것’에 동양의 선비는 세상의 변화를 예감했는지 이것에 관해 달리 해석이 없다. 결국 그는 미국사회의 정신문명 ‘자유’에 대하여 깊이 관조하는 것 같다.

미국과 세계각국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진실한 보도

장기범이 근무한 ‘미국의 소리(VOA)’는 꽤나 현대적인 시설이었다. 워싱턴에 있던 이 방송 시설은 그 당시 18개의 스튜디오, 40개의 디스크나 테이프 녹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설비 , 10개의 테이프 편집실, 녹음조종실, 주조정실, 편성실, 음악 및 음반 라이브러리가 있었다. 주조종실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기동성이 있는 것 중의 하나이며, 그것은 유선으로 미국내의 단파 송신기로 프로그램을 보냈다. 미국이 원래 합중국이고 워싱턴에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데, 장기범은 특히 이 ‘미국의 소리’ 방송국을 ‘인종전시회장’이요, ‘아나운서의 전람회장’이라 명명한 바 있다. 그는 “수십 개 스튜디오에서는 가지 각색의 말이 흘러 나오고 있다. 내가 고국에 소식을 전하고 있으려면 미국 중고등학교 남녀 견학생들이 신기한 눈초리로 스튜디오 유리창을 들여다 보던 일이 생각난다”고 그 당시 풍경을 회상하기도 했다.

장기범이 파견된 당시의 ‘미국의 소리’는 외국의 수많은 청취자들에게 미국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힘썼다. 자유세계에는 USIS의 각종 문화와 공보활동을 ‘미국의 소리’ 프로그램에 실어 보냈다. 반면에 공산세계에는 전파방해를 효과적으로 회피하여 미국의 자유와 진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1960년대 초만해도 공산지역에서는 아직도 검열의 장막이 둘러 있고, 자유로운 정보의 유입에 엄중한 제한이 있었다. 미국으로서는 이 공산지역의 정보 침투야말로 ‘미국의 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미국의 노력은 절반 이상을 소련(구 러시아), 동유럽 위성국가, 중공(현 중국), 북한, 월맹(북 베트남)에 기울였다.

‘미국의 소리’에는 각 방송지역에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항에 중점을 두어서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미국 내에서의 중요한 사건, UN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실, 국제회의로부터의 직접 보고, 자유세계 내의 각국 소식 등이 포함되었다. 물론 소련, 중공, 북한 등 공산 위성국가 내에서 발생한 사건들도 마찬가지로 방송했다. 장막에 가려진 국가의 청취자들은 이 ‘미국의 소리’ 방송을 통하여 자국의 정치적 변동과 경제적 발전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공산국가나, 독재국가에서 통재되는 신문과 라디오 뉴스가 방송되기도 했다. 우리 나라도 60년대 말의 독재 권력층에게는 이 ‘미국의 소리’가 눈엣가시였다.

처음 5.16 발발엔 환호했으나 장기집권엔 거부감

장기범이 ‘미국의 소리’에 파견된 시기는 50년대 막바지였다. 그 당시 제 1공화국 자유당 정부는 이승만의 선재집권, 이기붕의 부통령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치정같은 정치에 국가와 사회는 어둡고 불안하기만 했다. 가난에 찌든 국민들은 어느 한 군데도 의지할 곳 없는 막막한 상황에 갇혀 있었다. 장기범은 이러한 시대적 환경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국민 모두가 그렇게 목말라했던 ‘정의가 강물처럼’ 넘치는, 그런 사회를 장기범은 희구했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그의 사후, 그를 기리는 글을 쓰기 위해 추적한 결과, 그는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들도 정의롭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생전에 그가 그렇게 갈망했던 정의로운 시대는 오지 않았다.

그가 ‘미국의 소리’에 체류한 지 1년도 못되어 4.19혁명이 일어났다. 1960년 4월 젊은 학도들은 부정 축재와 장기 집권에 혈안이 됐던 독재 권력을 붕괴시켰다. 그리하여 민주정부인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이 민주당 정권도 민주주의를 시험하다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고, 호시탐탐 권력을 엿보던 군부에 의해 5.16쿠테타가 발생했다. 정치싸움에 시달리고 가난에 찌든 국민들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따라서 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그 시의성으로 볼 때, 괜찮은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기범도 고국의 후배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고대했던 쾌거로 기록하고 있다.

“멀리서 느낀 4.19의 감격과 다음에 온 실망, 그러다가 급기야는 5.16의 새 감격. 그러니까 미국시간으로 5월 15일(월) 하오 6시 30분 5.16 군사혁명의 첫 소식을 전하던 감격과 흥분은 오래 오래 내 가슴속에 간직될 것으로 믿습니다. 방송을 끝내고 VOA의 최창욱, 이종완 형과 어깨를 얼싸안았으며 우리 아나운서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무슨 기적이라도 없는 한 조국은 영 소망이 없다고 늘 애태우며 지내다가 급기야는 그 기적의 보를 듣고 멀리서 또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1961년 5월 군부가 내건 ‘혁명공약’은 그 당시 시름에 빠졌던 국민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장기범도 그 시대가 얼마나 암울했으며 해외에서조차 감격의 눈물을 흘렸겠는가. 제1공화국의 장기집권, 제2공화국의 사회혼란이 국민들을 절망의 늪으로 빠지게 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특히 5.16 주체들이 내건 혁명공약 6항은 대단히 매력적인 구호였다. 군인들이 내건(민간 조항이 아님)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공약은 순수한 우국 충성의 발로로 보였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국민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군부 정권도 권력의 속성 앞에는 어쩌지 못했다. 집권세력은 60년대 말로 들어서면서 3선 개헌 70년대 초 유신 선포 등 일당 독재와 장기집권 등으로 불의의 집단이 되어갔다. 그렇다. 정의에 기초하지 않은 정부나 방송은 오직 조직폭력일 뿐이다. 차후에 기록하겠지만, 장기범은 ‘미국의 소리’ 파견시에 받은 그 감격을 70년대 들어서 자주 후회했다고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전언하고 있다. 그렇기에 장기범은 이러한 권력층과 연줄이 닿는 가족과 친지들이 소위 ‘출세의 통로’를 권유하면 불호령을 내렸고, 최고위층과의 자연스러운 만남도 의도적으로 회피했을 정도였다.

미국 체험을 토대로 올바른 방송인으로서의 삶 추구

미국이라고 모든 것이 자유이고 마음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곳처럼 제약이 많은 곳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주치금지구역으로부터 왼쪽으로 돌아선 안 되는 곳, 그밖에 여러 가지 차량규칙으로부터 상가의 영업시간, 술먹는 사람에 대한 단속, 여러 가지 제약이 많습니다. 만일 한번이라도 사람에게 폭행을 하면 법정에 끌려다녀야 하고 벌금을 물어야 하고 치료비를 부담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진출할 길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음식점에서 술을 먹고 소리없이 가만히 졸고있는 사람이 경관에게 끌려나가는 것을 보았읍니다. 너무 떠드는 것도 금물이지만 너무 조용히 졸고 있는 것도 법에 저촉되는 것이니 재미있는 일입니다. 어떻든 자유라고 해서 무엇이자 제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법을 지키고 법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기 생활을 명랑하고 자유롭게 영위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읍니다.

장기범은 이렇게 해외 견문에서 쌓은 체험을 통하여 올곧은 방송인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토양이 그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자유와 정의를 실천하는 언론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했을것이다. 그는 관리자가 되어서도 이 기조를 굳게 지켜 나갔다. 특히 그는 권력에 기대거나 직위를 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기범은 관료적이거나 권력을 이용하려는 방송국 주변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장기범은 미국이 질서 있고 깨끗하며 합리적인 사회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귀국 후에 우리도 깨끗하고 정직한 사회를 만들어야겠다고 기회가 있을때마다 강조했다.

미국의 라디오는 자동차의 것

장기범은 귀국 후 어느 좌담회 자리에서 라디오 매체의 미래를 예측한 미국의 상황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미국에서는 이제 라디오라는 것은 자동차의 것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젼의 출현관계지만 라디오는 그저 자동차를 타고 있는 동안 혹은 부엌같은 곳에서 듣는 것으로, 그러나 미국인의 생활이 절반은 자동차 속에서 지내는 것이니 라디오는 역시 라디오대로 언제까지나 그 존재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라고 언급했다. 장기범의 이 코멘트에서 1959년대 말, 이미 미국은 라디오가 가족 또는 정치 매체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첨단 선진국임을 실감하게 한다. 또 한 가지는 장기범도 그 당시, 라디오 매체의 특수성과 독립성을 예단한 방송 선각자다운 전망을 피력하고 있다.

장 기범은 1961년 9월 13일, 미국의 소리 파견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 중앙 방송국 방송 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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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6/07 PM 01:53
작성자: 아나운서실이세진

방송인물평전 장기범⑥

결혼 그리고 '미국의 소리(VOA)' 파견

김성호 KBS 경영개선추진단장


장기범은 1959년 2월, 만 32세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50년대 말의 세상 풍속으로는 만혼인 셈이다. 그 당시 우리 방송계에서 가장 촉망받던 인기 아나운서이자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치프인 그의 결혼은 뉴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도 유일한 방송전문 잡지인「방송」에 자신의 결혼을 이렇게 공지했다. "2월은 나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지 못할 달이 되었습니다. 오랜 모색과 방황 끝에 안주한 지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 결혼을 축하해 주신 여러분께 삼가 지상을 통해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원문대로 인용)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을 배필로 맞아 이 장기범의 결혼은 그 해 방송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토픽이었기에, 강익
수(姜益秀) 아나운서도 선배의 혼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강익수는 장기범이 그 해 8월 도미(渡美)하자 방송계장(아나운서실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60년대 초 중병(암)을 극복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장기범아나가 결혼했다. 표류(漂流)하던 사람이 구조되었다는 것 이상으로 「센세이쇼날」한 일이었다. 사실 그는 오랜 「보혜미안」이었으니까 그날은 종일을 비가 왔다. 수많은 여인들의 꿈이 분해되어 바람이 되고 눈물이 비가 되어 흘러내린 것이다.(원문대로)

그러나 이 40여년 전의 대사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연로한 가까운 친척들까지도 결혼 일시와 장소를 알지 못했다. 평전을 쓰는 필자로서는 상세히 알아야 할 책임감에서 장기범의 결혼관련 자료 찾기에 나섰지만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1959년 방송잡지를 검색하다 논거(論據)가 분명한 자료를 발견했다. 필자가 불분명한 이 짧은 글은 장기범이라 명명하지 않았을 뿐, 그의
혼사에 대한 청취자들의 전화문의를 아나운서들이 답변하는 내용이었다. 원문을 간추려 전하면 다음과 같다.

그렇지 않아도 말이 많은 우리 아나운사-실은 요 몇일간을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말이 많았다. 물론 그것은 우리 현업과는 다른말이었다. 「그러면 그곳은 제가 맡지요」「네! 이쪽은 우편으로 발송하겠습니다」「네! 네네! 오는 15일 오후 1시입니다. 네 바로 종로4가 전매청옆 동원예식장입니다」「신부가 누구냐구요! 이름이 말입니까 혹은 출신교를 알고 싶으십니까. 고려시대에 핀 이화꽃  어울리지요? 그렇게 어렵냐구요! 왜! 이화꽃 모르세요! 고녀(高女)가 아니구 이화대학이란 말씀이에요!」

이 기록을 유추해 볼 때, 장기범의 결혼식과 관련된 내용임에 틀림없다. 우선 이 글이 실린 잡지가 시기적으로 1959년 2월호라는 점과 "고려시대에 핀 이화꽃"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신랑신부의 출신교를 빗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장기범은 1959년 2월 15일 오후 1시 종로4가 동원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장기범이 반려자로 맞이한 배필은 만 24세의 박종설(朴鍾卨)이었다. 그녀는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재원으로 미모와 학벌을 두루 갖춘 여성이었다. 더욱이 박종설은 종로통에서 상가를 운영하던 부유한 가정의 무남독녀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에게 장기범의 생활관과 캐릭터는 힘겨운 파트너였을 것이다.
장기범 족장(아나운서 실장)은 방송 후배들을 각별히 챙기는 보스 기질에, 소신과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인데다 정의감에 불타는 휴머니스트였다. 이 아나운서실장 시절, 그는 한 마디로 불사조였다. 장기범은 시뻘겋게 단 난로 위에 털썩 주저앉아 관헌의 횡포를 굴복시킨 일이 있는가 하면, 아나운서 특근 수당에 인색한 행정서기관에게 유리컵을 내던져 권익을 찾은 일도 있다.
그런 대쪽같은 성격에 가부장적 기질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없었다. 국민총생산량이 100달러도 안되던 빈곤의 시대에, 박봉의 공무원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유독 후배 방송인들을 뒷바라지 하는 몫이 있었기에, 그는 더욱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갈 곳도 없고, 기댈 데도 없던 후배들 때문에 결혼 초부터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박종설은 30년 결혼생활동안 이러한 환경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신혼 살림은 부친이 마련해 준 북아현동의 조그만 개인 주택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졌지만 이 보금자리에서 6개월 간 신혼 생활을 하다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의 소리(VOA)' 아나운서로 파견되어 도미(渡美)한다. 1950년대에 <도미(渡美)>라는 말은 신비 그 자체였다. 저개발국가 빈곤의 나라에서 공무로 2년간씩 해외근무를 한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월급도 초청국가에서 부담하니 금
상첨화였다. 이렇게 장기범은 우리 방송사상 첫 케이스로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다. 장기범은 그 해 8월 12일 부인과 함께 김포공항을 출발, 새 임지인 워싱턴으로 떠났다.

VOA로 출발시 후배들에게 국내 월급 배분조치
장기범은 워싱턴으로 떠나기 앞서 '보스'로서 '후배사랑'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빈곤의 시대인지라, 모두가 어려웠지만 가사 형편이 특히 곤란한 후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월급을 매달 수령할 수 있도록 조처해 놓고 떠났다. 그는 당사자들이 자존심 상해하거나 소문이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 사실은 장기범 사후(死後)에 수혜를 받았던 후배가 선배의 배려에 눈물겨워 하면서 고백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 후배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나는 미 국무성에서 많은 월급을 받네. 보수를 두 군데서 받을 수 없잖아! 미국생활에 충분한 급료야"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는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아호 인천(仁泉)다운 처사이며 진정한 방송계의 선인다운 행동이었다. 이러한 그의 선
비다운 언행이 그의 사거 13년이 지난 오늘까지 추모행사를 갖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 당시 '미국의 소리'는 미국해외 정보국의 방송부로서 미국 정부를 대변하여 세계의 여러 지역에 있는 수많은 청취자들에게 객관적인 뉴스, 미국 정책에 관한 최신의 사실, 그리고 미국인의 생활과 문화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 방송은 장기범이 파견되었던 그 해, 76개의 송신기를 가진 방송망을 통하여 37개 국어로 24시간 동안 쉴새없이 온 지구를 향해서 방송되고 있었다.
이 '미국의 소리' 방송의 한국어 프로그램은 극동(極東)으로 보낸 최초의 VOA방송중의 하나였다. 한국으로 보낸 첫 프로그램은 1942년 2월 24일에 방송되었다. 그날 VOA 한국어 아나운서는 마이크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미국의 소리방송입니다. '미국의 소리'는 최초의 방송을 한국에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진실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모토가 될 것입니다.>
장기범이 파견된 시기에 VOA의 한국어 방송은 30분물 2개를 내고 있었다. 오전 7시와 오후 10시 30분에 방송되었다. 아침방송의 처음 10분 동안은 KBS 제1방송에의해서 중계방송 되고, 제2방송에서 아침방송 전부가 중계되었다. 이 중에는 한국 청취자들에게 특히 흥미있는 두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을 방문한 각계각층의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터뷰 프로그램"과 다른 하나는 한국의 경제
적 여러 면을 보도하는 "발전에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앞의 프로그램은 토요일 아침에, 뒤 프로그램은 수요일 아침에 방송되었다.
장기범에게는 이 "발전에의 길"이라는 프로그램 내용이 못마땅한 게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아끼던 후배 아나운서 최세훈에게 조국애의 울분을 이렇게 항공엽서에 담았다. "미스터 최,「한국의 약진상」이라고 해서 수원 어느 지구에 일만 오천환을 들여 우물을 팠다는 기사를 번역하라고 해서 이곳의 한인들을 벌컥 뒤집어 놓았습니다 민재호 선배의 말을 빌리면 우리 한국은 5천년 전부터 우물을 파서 먹었다고요 "
VOA는 한국어방송 아나운서를 채용했는데, 앞의 인용문에서 거론된 민재호 선배와 이계원 선배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두 분 모두 장기범의 아나운서 선배이자 상사였다. 두 분이 아나운서 쌍벽을 이루었고 해방 후부터 한국전쟁까지 방송과장을 앞뒤로 맡았다. 물론 이계원이 방송선배이다.
장기범은 이 두 선배에게서 아나운서의 훈도을 받았다고 직접 고백한 바도 있다.
이계원은 1951년 10월 13일 VOA 초청을 받고 한국을 떠난 것으로 동아일보 기사에 나타나 있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는 이미 호, 민 양 아나운서가 있는 바 금번 이 아나운서의 참가로써 일층 청신 활발해질 것이며 왕년의 명 방송이 들려
올 것이 기대된다."<동아일보 1951.10.21> 이 기사에서 '호'는 미모의 경성방송국 여자 아나운서 호기수를, '민'은 민재호를 일컫는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이계원보다 민재호가 조금 앞서 VOA에 들어갔음을 알 수있다. 민재호는 한국전쟁 발발시 서울중앙방송국 방송과장이었는데. 얼마 후 동경소재의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국에 근무하다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보다 앞서 정착한 분은 황재경 목사였다. 그는 이미 1951년 3월 미국 정부로부터 미국에서 일평생을 살 수 있는 영주권을 부여받았다.

한국방송사상 최초의 해외 장기 파견 근무 장기범은 이 VOA 시절의 체험담을 신문 잡지에 쓴 적이 있는데, KBS가 방송50 주년을 맞아 펴낸 단행본「한국방송사」에 그가 기고한 내용은 방송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라 여겨진다. 그는 "흔히 필자(장기범)를 가리켜 VOA(미국의 소리) 방
송에 최초로 파견되었던 아나운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VOA에 가기 이전에도 VOA 한국어 방송에 우리 나라 사람이 참여하고 있었다"라고 전제하고 그 사람들의 VOA와의 인연을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황재경 목사의 사정을 비롯해 박경호(朴慶浩)가 미국 시찰 후 잔류한 점, 민재호가 한국전쟁 중에 VUNC를 거쳐 VOA로 참여한 경위, 이계원의 자청 케
이스 등을 밝히고 있다.
장기범은 계속해서 "이와 같이 이미 여러분이 VOA에서 한국어 방송을 해 온 터에 유독 필자더러 최초로 VOA에 파견된 아나운서라고 가르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라고 자문하면서 그 해답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장기범의
글은 편집상 잘려 나가 다음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이 책자가 출간된지도 이미 25년이 지났고 필자도 고인이 된 지 오래기 때문에 달리 알아볼 길이 없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가 주장하려는 바는 자신의 케이스는 미국 정부의 공식 초청이요, 국가 대 국가의 계약에 의한 공적 행위에 따른 것이며, 파견기간이 한정되어 계속 순환 교류근무가 가능하다는 점 등을 밝힌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따라서 그의 파견은 방송국이 실시한 위탁교육이 아닌, 최초의 해외 파견근무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기간도 무려 2년 정도의 장기 체류였다.
장기범은 미국생활을 하면서 조국과 자신을 냉철히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는 우선 금주에 들어갔다. 애주가로 유명했던 그가 2년동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최세훈의 표현에 따르면 "황색 코리언인 자신을 냉철하게 응시했다"고 한다.
그는 현대의 낙원이 된 아메리카에서 찬란한 물질문명의 연원이 무엇인가를 천착하고 그 저류를 파헤치려는 노력을 부단히 추구했다. 그가 찾아간 1959년 여름의 워싱턴은 한국과는 극단의 상황이었다. 물론 고온의 기후, 일몰의 뒤바뀜은 그런대로 세월이 지나면서 환경에 적응했지만 부자 나라의 문명은 그로 하여금 커다란 이질감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장기범은 "풍토며, 언어며, 모든 풍속이 생소한 곳에서 혼이 났습니다마는 기왕에 온 바에야 충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피력하기도 했다. 우선 그는 물질문명의 풍요로움에 놀란다. 이처럼 자동차가 우리의
"신발"임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지만 무엇보다도 "남자가 장을 보는 것"에 동양의 선비는 세상의 변화를 예감했는지 이것에 관해 달리 해석이 없다. 결국 그는 미국사회의 정신문명 "자유"에 대하여 깊이 관조하는 것 같다. 이 자유론은 다음 기회에 사례를 들어 살펴보았으면 한다.
장기범은 미국에 건너간 그 해 말 첫 아들을 얻고 원용(源容)이라 작명한다. 그러나 문중의 항렬이 '석(錫)' 자인지라 족보에는 석용(錫容)으로 적었다. 그의 생년월일은 1959년 11월 7일이다. 장기범의 아호를 작명했던 민재호는 원용이가 워싱턴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화용(華容)이라 불렀다고 한다. 워싱턴이 한자로 화성돈(華盛頓)이라 불린다는 데서 연유한 발상으로 보인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장기범이 미모의 부인과 건장한 첫아들 원용을 안고 촬영한 사진은 인상적이다. 이 원용은 지금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속지주의 국가에서 태어났으므로 미국 영주권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도 부친의 영향 때문인지 로스앤젤레스의 한 방송국(KTE)에 근무하고 있다.
사진 얘기가 나와서 부연해야 할 말이 있다. 장기범의 결혼 사진과 큰 아들 원용이의 혼례 사진을 함께 싣는 것이 결례가 아니길 바란다. 평전은 개인사이기 때문에 양해도 되겠지만, VOA시절의 얘기에서는 원용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원용이의 결혼은 부친 장기범 사후의 일이다. 거기 사진에는 숙부 장기택과 신랑양 옆으로 장기범이 사랑했던 명 아나운서, 이규항 김승한 전 아나운서실장들의 모습이 정겹고 예의를 느끼게 한다.(계속) kshkbh@k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