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파 방송 밀청 사건 대담 - 1992년 8월 29일 - 서울 (노시창)

 
대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개시 50주년 기념 특집.
방송일: 1992년 8월 29일
참석:
송 남원: 전 경성 방송 작가
조 종국: 전 경성 방송국 엔지니어
유 병헌: 방송사 연구가
문 시형: 방우회 회장
사회: 노 시창
대담 녹음: 서울 롯데 호텔

엠씨:오늘 8월 29일로 방송 개시 50주년을 맞은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지난 반세기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정확하고 객관적인 뉴스를 전함으로써 격변의 세월을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귀중한 소식원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일본의 한반도 식민 통치 기간중 세칭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이 사건은 당시 방송 관계자들이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는 미국의 소리 뉴스를 통해 몰래 듣고 이를 외부에 전파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다수가 검거되고 고문과 징역형을 살아야했던 사건입니다. 이 시간에는 한국의 방송사 연구가 유병헌씨와 밀청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송남원씨, 조종국씨, 그리고 문시형 방우회 회장으로부터 당시의 회고담을 듣는 특별 순서를 마련했습니다. 대담에 노시창 기잡니다.

노: 유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먼저 이 사건이 어떻게 발단이 됐는지부터 설명을 해주십시오.

유: 출발은 기술진이 좀 했죠. 그리고 단파 수신기를 조정할 수 있는, 단파 수신기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기술자 밖에 없었으니깐. 이 단파 방송 연락 운동 그 자체는 기술자에 의해서 출발이 됐다고 확정을 짓고 싶습니다.

노: 그런데 그런 분들이 그 방송을 듣고 자기들만 알고 있었으면 그 이상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요. 그것이 외부로 퍼져 나감으로써 그 때 당시에 집권층에 위협이 되고 불안의 요소가 됐을텐데… 어떻게 해서 번져나갔고 그것이 누구한테 번져나갔는지요.

유: 저도 그런 내용의 방송을 간혹 밀청한 사람인데 그런 방송을 들으면요, 얼른 얼굴이 하얗게 변합니다. 가슴이 막 떨립니다. 옆에 있는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생각하면 굉장한 공포에 떱니다. 또 그런 내용을 듣고 집에 가서 이불 속에서 자기 부인, 친아버지 이런 분들한테 그런 얘기를 끝까지 감출 수가 없어요. 우리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이 되고 모든 외국에서 우리 독립을 도와주고 이승만 박사가 가서 독립 운동하고 온다는 사실을 알려 올때는 한국 민족은 가만히 참을 수가 없죠. 그런데 그 말을 집에 가서 은밀하게 이웃에 퍼지고 독립 운동하는 애국자들에게 퍼지고 이렇게 된거죠.

노: 네. 그러면 잠시 그와 같은 단파 방송의 내용을 외부애 전파하신 역할을 하신 송남원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송남원 선생님은 그 사건으로 인해서 혹독한 옥고도 치르시고 그러셨는데요.

송: 그 당시, 40년때부터 시작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전부 없어지고 또 국내에는 일본 사람들이 한국 말을 못 쓰고 한국 글을 못 쓰고 전부 일본 말을 하라고 하고 일본 글을 쓰라고 할때, 서울 중앙 방송국 HLKAJE 방송이라고 하는데서는 한국 말을 주로 방송했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소설도 쓰고 또 연극 같은 것도 하고 아동극 같은 것도 해서…나는 여느 작품을 쓰기 때문에 방송국 직원들과 가까이 지내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것이 하나의 기초가 되어가지고 세계의 돌아가는 또 연합국의 승리 또 일본 군국주의의 패전에 진상을 알게 되서 그 진상을 갖다가 그 당시에 독립 운동 선상에 있던 김병노씨라던지 이일씨라던지 또 윤보선씨라던지 또 송진우씨라던지 기타 서울 안에 있던 항일 클럽에다가 이 사실을 전달을 해서 결국은 건국 준비에 이바지하도록 그렇게 하다보니, 결국은 그것이 실제로 활동을 제일 중추적으로 하시던 분이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있던 홍익범씨올시다. 홍익범씨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끝내고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하다가 동아일보가 폐간됐기 때문에 그 때부터는 시간 여유가 상당히 많아서 나하고 매일 같이 만나게 됐고, 또 이 VOA를 통해서, 또 서울 중앙 방송국의 기술자 여러분들이 제공을 해주는 그 방송 내용을 홍익범씨가 다시 김병노씨라던지 이일씨라던지에게 전달하게 되는 이런 과정을 통해가지고 활동을 하다가, 42년 12월경에 일본 경찰에 이것이 발각이 되가지고 수백명이 구속을 당하고, 그러고 20여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서 모두 나오게 됐습니다.

노: 이번에는 일본 사찰 당국의 반응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이렇게 외부로 번져나가게 된 것을 알고 나서 그 일본 당국에서는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유: 일본에서는 경찰이 방송국 직원, 한국 사람의 뒤를 미행하는거죠. 감시를 당하는거에요. 또 때에 따라서는 헌병대도 방송 직원의 가택 수색을 한다던지, 추적을해 따라다닌다든지 그런 감시 속에서 경성 방송국의 한국 사람들 직원들은 살아야했습니다. 그런데 눈초리가 그 끈덕진 추적, 여기에는 완전히 끝까지 비밀이 보장됐어야될 이 사건이 결국은, 뭐 사람이라는건 부주의 할수도 있는거고 또 은밀하게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그 잠복했던 사복 경찰관이 들을 수도 있는 얘기고, 그래서 이게 새나가게 된거에요. 그래가지고 일망타진이라는, 참 중앙 방송국에서만 40명, 전국 방송국 직원 중에서 약 150명, 이거 방송국 직원만 관계된 사건이 아니거든요. 종교 지도자, 정치 지도자, 국내에서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 의사, 변호사, 뭐 각계각층이 망란된 사람들의 의해서 이 단파 방송 청취 연락 운동이 전개됐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체포되고 또 체포를 해서 갖다가 이 사람들을 그냥 순수하게 다루는게 아니라, 혹독한 고문을 합니다. 네. 제가 쓴 책에 고문 내용이 나와있지만 지금 여기 계신 송남원 선생, 조종국 선생, 이 분들 모두 정말 지금 살아있지만 그때 다 죽었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말못할 고문을 뭐 한두가지가 아니라 전기 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뭐 말 할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고생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노: 그리고 징역형도 사신 분들도 많이 계셨을텐데요.

유: 그렇죠. 방송국 직원 송기석씨 같은 경우엔 2년 징역 언도를 받아가지고 미결 기간이 9개월, 징역 언도가 2년, 그러니깐 2년 9개월의 언도를 사는셈인데, 8.15해방이 뜻밖에 빨리 왔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 형기를 40일 남겨 놓은채 서대문 형무소의 문을 박차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민족적인 절규가 이루어진 순간입니까? 이게 모두가 VOA 방송을 통해서 보내주는 그 참 뼈다귀 있는 애국의 소리, 민족의 소리, 혁명의 소리, 희망의 소리 방송이,,, 이승만 박사가 그대로 얘기한거에요. ‘이 방송은 혁명의 소리요. 희망의 소리올시다. 1000명에 한사람이 듣더라도 듣는 사람은 전하시오’. 이렇게 얘기한거에요. 그리고 인제 또 그것 뿐만이 아니라 중경에서 김구 선생이 독립 운동 하면서 중경 방송국을 통해 마찬가지로 보내왔다구. 그러니깐 듣는 사람이 도저히 이건 흥분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이루어진게 단파 방송의 전모가 되는거에요.

노: 옥살이를 하는 도중에 돌아가신 분도 계신가요?

유: 돌아간 사람이 문헌에는 여섯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거기서 뭐 각계각층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생이 됐는데 ? 많이 때리고 많이 고문하고 해서 죽어야 됐겠습니까? 이 이희덕씨라는 분도 결국 끝내 소생을 못하고 미국 시민이었지만 죽어버리고 만거에요.

노: 어려웠던 당시에 그 사정을 조종국 선생님으로부터 들어보겠습니다. 당시에 engineer셨는데 단파 수신기를 제작해서 보급했던 분으로 일경으로부터 아주 심한 그런 고통을 받으셨는데, 앞서 말씀 드린 송남원 선생님께서도 물론 많은 고통을 당하셨고요. 조종국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많이 조사를 당하고 하셨는데요…

조: 아… 고문은 무척 당했어요. 한 6개월 간, 경찰부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죽고 싶더군요. 어떻게 고문을 하는지… 그냥 뭐 물을… 물고문이죠. 말하자면… 하루에 한번씩 꼭 불러다가 물고문을 했어요. 그러니깐 뭐 자살하고 싶은 생각 밖에 안나요.

노: 이 물고문이라는건 코에다 물을 붓고…

조: 코에다 물 붓고 수건 뒤집어 씌우고 물을 붓고 이러는데… 하여간 뭐 그야말로 지옥 같더군요.

노: 네. 지금까지 조종국 선생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면 이 조종국 선생님은 독립 운동으로 지금 이 단파 방송 사건으로 인한 독립 운동으로 건국 훈장을 받으신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이 최근에 와서 이젠 단순한 방송국의 사건이나 뭐 지역적인 사건이 아니고 하나의 그 독립 운동이었다는 그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지금까지 죽 방송사를 연구를 해오시면서 이 사건의 그 역사적인 평가를 선생님은 어떻게 내리고 계십니까?

조: 제가 왜정 시대부터 방송에 근무했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윤곽을 알고 있었고 일본 사람들이 패전해 갈때에 여기에 관계있는 서류 이런걸 다 막 불태워서 없애 버렸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하든지 이문제만은 밝혀 보겠다고 수십년 고생을 했어요. 그래서 있는, 공부한 그대로 자료 그대로를 가지고 1988년에 방송 센터에서 제가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를 하니깐 각계에서 이것은 참 놀라운 얘기다. 이것은 정말 독립 운동이다. 그래서 제가 용기를 가지고 여기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참 말이 그렇지. 일본 사람들의 총칼이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그 앞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방송 직원들이 싸워서 또 옥고를 치르면서도, 훤히 알죠. 아. 멀지 않아서 일본 놈들이 다 지고 갈것이다. 이런 얘기를 예상하면서 형무소에서 옥고를 참아 넘기면서 며칠 형기를 남기고서 8.15 해방이 되서 형무소 문을 자기들이 열고 나왔다는 사실, 이건 참 감격적인 얘기죠.

노: 네. 최근에는 바로 이런 사건들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 한국 방송 공사 건물 앞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섰습니다. 이 기념비의 이름이 물망비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이 물망비라는 이름을 짓게 되셨는지… 문시형 현 방우회 회장님으로부터 잠시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문: 그 당시에 그 희생되신 분을 위로해 드리고 또 그 당시에 많이 잡혀 운동에 참여하신 분들은 우리 방송인의 성악자 아닙니까? 그러니깐 충성심이 있고 애국심이 있어서 그런데 그 분들의 뜻을 우리가 이렇게 잊어버리면 안된다. 그게 그 물망비라고 그래서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물망비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그래서 물망비하고 비석에도 그냥 단파 사건이란 얘기는 하지 않고 물망비라고 비석을 지었죠.

노: 방우회의 문시형 회장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미국의 소리를 쭉 들어오시면서 또 관찰하시고 또 한국의 방송사를 연구하시면서 이제 미국의 소리도 50주년을 맞았는데 혹시 저희 미국의 소리에게 바라는 어떤 바가 있으시면은 한 말씀 해주시죠.

문: 뭐, 선진 미국이고 그 제도, 시설 그 밖에 모든 것이 다 기가막힌 잘 되있는 VOA이니깐 더 바랄게 있겠습니까만은 저희가 방송 현업을 오래한 사람이에요. 6.25이전부터 6.25후, 제가 쭉 VOA를 아침 저녁으로 수신해 가지고 중개를 한 사람인데 그때에 우리들이 밥은 못 먹어도 VOA방송은 빼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 극변하는 정세에 특히 한국의 정세가 불안했을 때에 진짜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주는 그런 고마움… 저희들이 이제 많이 늙었지만, 그 때 젊어서 느끼던 VOA의 고마움은 참 잊어버릴 수가 없죠. 특히 왜정 시대에 이러한 단파 방송을 몰래 숨어서 듣던 사람의 한 사람으로서는 그 고마움에 대해서는 감격적이고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을거에요. 근데 요새 와서는 그런 것이 좀 이렇게 식어 가는게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어가는데… 요새 방송 시간이 어떤지는 제가 잘 모르겠는데 그 VOA가 우리 한국의 좀 아주 상주하는 특파원 하나를 두고 여기서 통신만 받아서 하실게 아니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생생하게 육성을 담아가지고 보내서 방송이 다시 나올수 있는 그런 제도가 있으면 참 좋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 네. 지금까지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개시 50주년을 맞이해서 한국어 방송 청취로 인해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 단파 방송 밀청 사건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특집 방송을 보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