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톨릭 교황 고 요한 바오로 2세를 뒤이을 차기 교황 선출을 위한 카톨릭 추기경비밀회의, 콘클라베가 시작된 가운데 역사가들과 관측통들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발자취와 업적을 심층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는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있어서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해 전문가들의 견해를 통해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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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0월 16일 로마 카톨릭교 추기경 비밀회의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됐을 때 그의 나이는 58세로 20세기 카톨릭교에서 최연소 교황이었습니다. 그의 세속명은 카롤 보이티야.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에 선출된 뒤 그가 선택한 이름입니다.

그의 선출은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4세기 반만에 비 이탈리야계, 그것도 소련의 통제를 받던 공산국가 폴란드 출신 사제가 교황에 선출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산권의 종주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곧바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곳 워싱턴 소재, 민간 국제문제 연구단체인 내셔널 시큐어리티 아카이브의 냉전시대 전문가 맬컴 번씨의 말을 들어봅니다.

“ 입수 가능한 몇 가지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소련은 새로운 교황선출이 미치게 될 영향을 즉시 깨닫고 그에 대응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카톨릭교 교황을 가리켜 지휘할 군대가 없는 사람이라며 그의 영향력을 폄하하고 조롱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좀더 현대화된 소련 지도자들은 폴란드 출신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 미치게 될 영향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

요한 바오로 2세의 영향은 교황으로 선출된지 8개월 만인 1979년 6월, 고국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교황이 폴란드를 방문하는 아흐레 동안 그야말로 폴란드의 전국민이 환영하고 나섰으며 교황이 집전하는 야외미사는 인산인해속에 진행됨으로써 정부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폴란드 공산정권에 대한 무언의 도전이 됐었습니다.

교황의 고국 폴란드 방문때 16세였던 라데크 시코르스키 전 폴란드 외무차관의 말을 들어봅니다.

“ 당시 백 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교황의 방문지 그니에즈노에 운집했습니다. 그니에즈노는 폴란드 카톨릭의 요람입니다. 그 때 군중의 힘이 어떤 것인지 나타났고 공산정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우리가 많은 수라는 것을 돌연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우리 나라가 우리들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수 공산당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그때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가 정부가 통제하는 텔레비전 방송의 공식 뉴스를 보고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뉴스에 비친 교황의 모습은 몇 안되는 수녀들을 만나는 것이 전부였고 실제로 그를 마지한 수 백만 명의 군중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때 누구나 공산정권의 2중성을 깨달았을 것으로 나는 생각합니다. ”

전문 관측통들은 1979년 교황의 고국 방문으로 폴란드 국민들이 국가부흥의 기운을 얻었고, 대중이 공산주의 정권에 맞설 수 있음을 깨닫게 됐었다고 분석합니다. 교황의 방문 1년뒤 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이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자유노조연대, 솔리대리티를 결성해 본격적인 노조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자 폴란드 공산정권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하고 솔리대리티를 불법단체로 금지했으며 자유노조 지지자 수 천 명을 투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과 교황은 계속해서 폴란드 국민들을 지원했습니다.

다시 시코르스키 전 폴란드 외무차관의 말을 들어봅니다.

“ 그렇게 되자 솔리대리티는 지하에서 활동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교회 지하실에서 모여 지하신문을 사보고 자유토론을 벌였으며 정부가 허가하지 않은 예술가들도 만나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우리는 그 모든 것이 교황을 알게되고부터 나타난 것임을 깨닫게 됐고 그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뒤 1983년에 두 번째로 고국 폴란드를 방문합니다. 그 때도 수 많은 폴란드 국민들이 교황을 열렬히 환영하며 모여들었습니다. 교황은 두 번째 방문에서 자유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를 만나고 당시 폴란드 공산정권의 실권자 공산당 제1서기인 야루젤스키 장군도 만났습니다. 교황의 두 번째 고국 방문 한 달 뒤에 폴란드 정권은 계엄령을 해제했지만 자유노조에 참여한 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수감돼 있었습니다.

한편, 공산주의 체제붕괴 과정에서 교황의 영향과 함께 두가지 요소도 크게 작용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로널드 레이건이 1980년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강력한 반공정책을 폈다는 점과 둘째로 개방과 개혁을 부르짖은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죠지 워싱턴 대학의 공산주의와 냉전시대에 관한 전문가인 호프 해리슨 교수의 말을 들어봅니다.

“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동유럽에서 무엇이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동유럽 사람들은 고르바초프라고 대답합니다. 공산주의 체제의 개혁을 시작한 사람이 고르바초프였습니다. 스탈린, 후르시초프, 브레즈네프 같은 소련 지도자들이 동유럽 국가들에 탱크를 보내 공산주의 이탈운동을 탄압한 것과는 달리 고르바초프는 당시 동유럽 공산권 동맹국들의 국내문제에는 간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

소련 최고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실제로 폴란드에서 자유노조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탱크를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1989년 1월에 마침내 폴란드 자유노조는 불법으로부터 해방됐습니다.

그로부터 1년뒤에 폴란드에서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고 그 결과 타테우스 마조비에스키 총리가 취임함으로써 공산주의 통치에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이웃 동부독일에서 베르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