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7일은 독일 나치정권집권시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가 소련군 병사들에 의해 해방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유태인과 집시 등 백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독가스에 살해된 후 화장되거나 또는 기아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독일이 마침내 연합군에 항복할 때까지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천3백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같은 공포를 견디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미국의 소리 기자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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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니아 씨는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으로 자신의 성을 밝히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브로니아 씨는 체구가 작은 여인이지만, 그가 겪은 시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 갔을 때 나는 12살 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8명이었는데, 직계 가족 가운데 6명이 살해됐습니다. 우리 어머니의 형제 자매들과 그들의 배우자가 11명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 나는 8살이었고, 전쟁이 끝났을 때는 14살이었습니다.

50년 동안 그것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내 아이들과 남편도 내게 자매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목이 졸려 완전히 질식되는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 다시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나는 울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한 번 영원히 울고 싶습니다. 나는 6년동안 마치 짐승이 된 것 같은 공포속에서 끊임없이 떨어야만 했습니다.”

당시에 아주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브로니아 씨와 그의 자매들은 부모들이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곧 그들도 아우슈비츠로 보내 졌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후, 브로니아 씨와 그의 어린 동생들은 다른 노약자들과 함께 나치 의사들에 의해 즉각 방역 대상에 뽑혔습니다.

“두 동생과 함께 끌려 나간 후, 우리는 서 있는 상태에서 옷이 모두 벗겨지고, 머리를 비롯한 온 몸의 털이 깍였습니다. 그들의 우리 몸에 문신도 새겼습니다.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가스실로 끌려가는 줄에서 도망쳐 나와서 언니가 서 있던 줄에 끼어 들었습니다. 그 때 언니는 아우슈비츠 노예 노동 대상자로 뽑혀 있었습니다. 언니는 나보다 8살이 많았고,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언니는 아름다웠고, 또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언니가 방에 들어 서면 방안 전체가 환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던 언니가 발진 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브로니아 씨는 딱딱한 나무 침대 위에서 자신의 옆에 누워 있던 언니의 몸이 고열로 불같이 뜨거운데다가 설사로 몹시 허약해 졌던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우리 막사의 책임자가 와서는 나무 침대 3층에 있던 나를 불러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막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스실로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막사 책임자는 내 목숨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내가 그 막사에 있던 유일한 어린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습니다. 내 목숨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거동이 힘든 언니를 도와 함께 가스실로 갈 것인가? 결국 나는 내 목숨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언니에게는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언니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습니다. 내게 세상 전부였던 언니를 구해지 못했다는 극도의 죄책감을 안고 평생 동안 살았습니다.”

대량 학살의 다른 생존자들도 바로니아 씨의 그같은 죄책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니아 씨는 자신이 목격한 모든 악들이 사람들에게서 선한 마음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1945년 초 소련 군이 폴란드를 향해 진격하는 가운데, 아우슈비츠에서 시작된 악명 높은 이른바 죽음의 행진 동안에 그 같은 점을 입증하는 한 가지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브로니아 씨와 수 천명의 다른 사람들은 영하의 기온 속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도 없는 가운데 며칠동안 걸어 가야만 했습니다.

“당시에 걸음이 늦어지면 총에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내 발걸음도 느려졌습니다. 그 때 유태인 여자 한 사람이 내게로 총이 겨눠지는 것을 보고는 나를 안고 걸어 갔습니다. 정말 초인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 분은 나를 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만일 살아남을 수 없다면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브로니아 씨는 그 자신과 가족들에게 일어난 불행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미국에서 어렵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세계는 브로니아 씨로 하여금 비관적인 생각을 갖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상 반 유대주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물론 르완다와 보스니아, 수단 같은 곳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본성은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에게 그 당시를 계속 상기시켜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듣게 되기를 바라는 것 뿐입니다.”

오늘날 브로니아 씨는 뉴욕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유태인 유산 박물관에서 안내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