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에 미국의 대외정책과 군축정책 입안자였던 폴 니체씨가 향년 97세로 20일 타계했습니다. 반세기에 걸친 공직 생활중 폴 니체씨는 7명의 미국 역대 대통령밑에서 봉직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뒤이어 전후 세계 냉전시대 조류에 막중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폴 니체씨는 1907년 1월 26일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 앰허스트에서 대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사립 명문고등학교에 이어 1928년 하바드대학교를 졸업한뒤 니체씨는 당시 미국의 두뇌들이 몰려들던 월스트리트 증권가에 진출해 투자금융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그러나 1941년 니체씨는 대외 경제정책 전문가로 미 국무부에 합류함으로써 공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니체씨는 미 국무부에서 무역과 경제관련 직책을 거쳐 1944년에는 전략 폭격 조사팀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50년에는 국무부 정책기획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1940년대말, 니체씨는 소련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이른바 [트루만 닥트린]을 기초하는데 합세했습니다. 정책기획 팀장으로서 폴 니체씨는 그후 수십년간 미국의 안보및 대외정책 기조를 이룬 국가 안보위원회 문서 제 68 호를 성안한 팀을 이끌었습니다.

트루만대통령은 당시 미국정책의 기초를 전면 재검토하도록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는데 그 소산이 국가 안보위원회 문서 제 68호, 약칭 NSC 68 이었다고 니체씨는 회상했습니다. 미국정책에 관련된 모든 다양한 문제점과 가능한 돌발 사태등을 세밀히 열거하고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려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NSC 68 은 기본목표뿐 아니라 그 봉쇄정책의 기본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그 정책의 실제 의미와 필요한 정책들을 다루었다고 니체씨는 말했습니다.

쏘련이 팽창주의로 기울고 있다는 전제조건에 입각해 NSC 문서 68호는 쏘련의 막대한 군 조직에 대항하기 위한 미 군사력의 신속한 증강을 제창했습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소련의 목적에 대한 당시 미국측의 그같은 평가를 확인하는듯 보였다고 폴 니체씨는 생전에 회고했습니다.

쏘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것은 NSC 68에 담겨있는 내용을 확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니체씨는 밝히고 그때문에 NSC 68 은 단순한 이론을 넘어 미국정책의 근간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폴 니체씨는 미국의 강경한 대외정책및 안보정책의 핵심 옹호자의 한사람으로 널리 여겨지긴 했지만, 반면에 핵군비 통제를 강력히 주창했습니다. 그같은 확신은 니체씨가 전시중 일본에 대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의 실효를 세밀히 분석했던 팀을 이끌면서 얻을 수 있었던 원자무기의 참담한 파괴력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모스코바 당국의 대외정책 목표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험에 힘입어 니체씨는 미국과 쏘련은 반드시 핵무기 통제에 관한 협상을 벌여야만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 일을 맡았던 사람들은 핵무기의 실체와 파괴력을 깊히 이해할수 있었다면서 니체씨는 그 현실을 깨닫게 되면 어느 한나라의 국익보다도 훨씬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말해, 이는 핵전쟁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것과 핵전쟁의 발발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혜안의 필요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니체씨는 지적했습니다. 이 국면에서의 일차적인 주역은 소련과 미국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시각차이에도 불구하고 핵전쟁의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긴요한것으로 보였다고 폴 니체씨는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소련과의 쌍무 군축협상이 성사되는데는 여러해가 걸렸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니체씨는 개인생활로 돌아가 성공적이고 이윤이 많은 금융 투자사업에 투신했습니다. 1961년 공직생활로 되돌아온 니체 씨는 케네디 행정부에서 국방차관보와 해군 장관을 지낸데 이어 죤슨 대통령 정부에서는 국방부 부장관을 역임했습니다. 1969년 그는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솔트 1]으로 알려진 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의 미국측 수석 대표로 임명받았습니다. 3년후인 1972년 니체씨는 미-소 요격미사일 금지협정을 성사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니체씨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닉슨 행정부를 뒤흔들고 따라서 미국의 협상 고지를 위협하던 1974년, [솔트 II] 협상대표 자리를 사임했습니다. 그후 니체씨는 카터 대통령때 체결된 [솔트 II] 협정의 상원 비준을 막는 운동을 벌여 이를 성공시켰습니다. 그러나 니체씨는 1981년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다시 새로운 군축 협상의 미국 대표로 임명됐습니다. 이 회담은 힘든 거래와 때로는 후퇴를 거듭한 협상끝에 1987년 중거리 핵무기 협정을 성사시켰습니다. 굳은 자세, 그러나 지칠줄 모르는 끈기로 거의 20년에 걸친 협상을 벌여온 닛즈씨에게 그것은 하나의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직접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진지한 협상을 갖지못했으며 그러한 협상들은 1969년 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니체씨는 회고했습니다. 니체씨는 또 1969년부터라 해도 INF 협정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서명해서 전달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다음 소련은 동유럽과 독일 통일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서서히 잃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냉전의 이같은 점차적인 이완은 폴 니체씨와 그의 동료들이 40여년전에 추구했던 봉쇄 정책의 성공을 의미했습니다.

심각했던 반대세력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하고 그 세계를 새 모습으로 변모시키는데 기여했다는 폴 니체씨의 말이었습니다. 금년 97세로 타계한 폴 H 니체씨는 미국 외교정책과 안보정책의 기본 골격을 형성했을뿐 아니라 전후시대에 지워질수 없는 족적을 남긴 몇 안되는 인물중 한사람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