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방송 여기는 워싱턴입니다’, 이번에는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은 미국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로 불리는 박용만 다섯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과 당시 미주 한인사회가 ‘무형국가론’을 주창하게 된 과정과 배경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국권 회복을 내세우는 한인 단체들이 미주 곳곳에 등장했습니다.
그러자 이들 단체가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됐는데요. 이와 관련해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의 설명을 들어봅니다.
[녹취: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 “그때 북미 쪽에서 가장 중심이 된 단체가 안창호가 1905년에 조직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한 단체 하나가 바로 공립협회고 이 공립협회가 나중에 국민회의 중심축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이 국민회를 중심으로 해서 조직적으로 러시아에 땅도 사면서 독립군 기지 개척 준비를 하고 이런 일을 하던 중에 1908년 3월에 바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 외교 고문인 스티븐스란 인물이 와요. 친일파예요. 바로 이 사람을 공립협회하고 대동보국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그중에 우리들이 잘 아는 두 분이 스티븐스를 총으로 처단하는데 그걸 장인환, 전명운 의거라 그러죠, 우리가... 그러니까 이때부터 갑자기 뭐냐면 그 재판을 후원하기 위해서 그건 암살이 아니라 정당한 독립투쟁의 방식이란 것을 재판을 통해서 하면서, 내부적인 결속과 통합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이 돼요. 아까 얘기했듯이 박용만 선생이 애국동지대표회의를 통해서 그런 회의도 하니까 그 두 가지가 여파가 돼서 결국은 미 본토에서는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하고 하와이에는 이미 여러 단체가 1907년 9월에 통합해서 한인협성단체란 것을 만드는데 이 단체들이 1909년 2월에 통합해서 만든 단체가 국민회에요.”
한편 국민회는 1910년 5월 대동보국회마저 통합하고 이름을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0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 지방총회는 다음 해 총회장으로 문양목을 선출합니다. 이 문양목은 박용만이 미국에 도착할 때부터 한인소년병학교 후원까지 도운 굳건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런데 총회장에 당선된 문양목은 박용만에게 대한인국민회 일을 함께하자고 권유했습니다.
하지만, 박용만은 이를 거절했는데요. 그러자 1911년 1월경 문양목이 직접 링컨으로 와 설득 끝에 승낙을 얻어 냈습니다. 단, 조건은 6개월 동안 대한인국민회 일을 정돈한 뒤 다시 학업을 계속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11년 박용만은 멀리 네브래스카주에서 ‘무형국가’를 조직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 네브래스카대학 봄학기를 휴학하고 2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신한민보는 왜 박용만을 주필로 초빙했던 걸까요?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1911년 2월에 바로 박용만 선생이 바로 대한인국민회 기관지가 ‘신한민보’라고 있는데 ‘신한민보’라는 건 새로운 한국이라는 의미잖아요? 그리고 민보의 민은 국민의 민자고… 하와이는 ‘신한국보’에요. 그러니까 하나는 새로운 한국의 ‘국’자를 따고 하나는 ‘민’자를 따서 새로운 한국의 국민이 주가 되는 신문이 각기 하와이와 북미에서 만들어지는 거죠. 그런데 바로 북미 쪽에서는 신한민보인데 1911년에 바로 박용만 선생을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을 해요. 그런데 평소 박용만 선생은 네브래스카대학교에 정치학과에 다니면서 ‘아메리카 혁명사’를 쓰거든요? 나중에 학위 논문으로? 그러니까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요. 그러니까 그것을 알고서 초빙을 해서 여론을 한번 우리가 나라가 없으니까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된다는 의미에서 박용만 선생을 초빙을 해 가지고 주필로 앉혀요.”
박용만이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하면서 내세운 ‘무형국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김도훈 교수의 저서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에 따르면 박용만은 ‘무형국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낭독: 박용만] 원래 국가의 성립은 백성과 토지로 기초를 삼고 법률과 정치로 집을 만드는 것이라. 그러하나 시방 우리는 백성은 있고 토지는 없어 불가불 남의 토지 위에서 집을 지을 수밖에 없는 고로 무형한 국가라. (출처-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김도훈 저)
신한민보 주필로 취임한 박용만은 몇몇 논설을 통해 이 ‘무형국가론’을 줄기차게 주장했습니다.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무형국가론이 최초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주장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이때부터 박용만 선생이 ‘무형국가론’이란 것을 발표를 하는데 무형국가론이란 것은 뭐냐면 나라가 이미 망했잖아요. 1911년이니까 1910년에. 나라가 없어요. 그러니까 무형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나라는 없지만, 우리가 정부를 세워서 나라를 되찾으면 된다고 인식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상 보면 1919년에 임시정부를 세우자는 게 처음으로 생각이 들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1911년 재미 한인, 즉 국민회하고 박용만 선생이 중심이 돼서 전개했던 이 무형국가론이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주장이라고 보시면 돼요.”
미국 하와이대학의 최용호 전 교수는 그의 논문 ‘박용만’에서 무형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이 해외에서 한인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 정치조직체가 필요하다는 박용만의 절실한 신념에서 나왔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에 따르면 박용만은 특히 조직 가운데 ‘정치조직’을 강조했습니다.
[낭독: 박용만] 조선 민족을 한 헌법 앞에 관할하여 한 무형한 국가를 설립하자 함이니 가령 시방 북아메리카와 하와이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다 일체로 그 공회에 속하게 하여 법률을 이같이 정하고 제도를 이같이 꾸며 뜻이 같든지 의견이 다르든지 감히 이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자. (출처-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김도훈 저)
이렇게 정치조직을 강조한 박용만은 무형국가를 미주에 건설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낭독: 박용만] 무형국가의 건설은 마땅히 미주와 하와이 한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북아메리카 대륙은 한인의 새 나라를 만드는 땅이 되어 장차 조선 역사에 영광스러운 이름을 더하게 되고 또 북아메리카 대륙에 나온 한인은 자기들의 새 정체를 조직하여 장차 조선 헌법의 아버지가 되어 조만간 한 무형한 국가를 성립해 누구든지 무릇 조선 산하에서 생장하여 조선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감히 이 범위밖에 벗어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출처- 미 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김도훈 저)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박용만이 해외 한인을 통일하고 결속시키기 위해 먼저 헌법을 제정하고 정치적으로 여기에 복종시켜 ‘무형국가’, 또는 ‘자치정부’로 개편하는 방안을 주장했다고 설명합니다.
하와이대학의 최용호 전 교수는 구체적으로 박용만이 구상하는‘무형국가’는 미국처럼 주권재민 사상에 따라 삼권분립이 되어 있고 연방제를 따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최 전 교수에 따르면 박용만은 이렇게 성립된 ‘무형국가’의 국민에게는 당연히 의무와 권리가 있고, 두 가지가 항상 공존하지 한쪽만 있을 수는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이렇게 박용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몇 달 동안 미주 한인사회에 ‘무형국가’ 수립 여론을 확산시키자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는 1911년 6월부터 해외의 모든 한인에게 ‘무형국가론’에 따른 국민의무금 제도를 시행하면서 사실상 재미 한인의 자치정부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됐습니다.
그런데 박용만과 대한인국민회가 추진한 무형국가론은 미주 한인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자인 한국 교원대학교 김도훈 교수는 ‘무형정부’, 즉 ‘임시정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고 이에 필요한 헌법을 구상한 것은 한국 역사상 처음이라고 평가합니다.
[녹취: 김도훈 교수] “그것도 일반적으로는 보통 해외 쪽에서는 망명정부, 그러니까 자기 나라가 망할 때 그 정부 중에 일부가, 정부 인사 중에 일부가 다른 나라로 가서 망명정부라는 걸 세우는데 여기서는 망명 정부가 아니라 국민들이 주체가 되는 정부를 세우자는 것이 굉장히 큰 의지죠? 그래서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시원이라고 볼 수 있는 사고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게 바로 박용만 선생의 무형국가론과 그리고 이를 지원을 했던 국민회의 사고 속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태어났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것이 나중에 1919년 임시정부까지도 결성되는 데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거죠.”
박용만의 노력으로 재미 한인들 사이에 대한인국민회를 임시정부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확산하자 박용만은 1911년 6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네브래스카주로 향했습니다.
그가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이유는 6월에 개학하는 한인소년병학교 업무를 관장하고, 이후 소년병학교 하기 군사훈련이 끝난 뒤 학업을 계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는 주필 부임 시 국민회 일을 정돈될 때까지만 일을 맡기로 한 약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한민보가 당장 주필을 구할 수 없어 그는 네브래스카주에서도 주필 업무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박용만 다섯 번째 시간으로 박용만과 당시 미주 한인사회가 ‘무형국가론’을 주창하게 된 과정과 배경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