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최초의 대서양 단독비행에 성공한 하늘의 영웅, 찰스 린드버그

찰스 린드버그가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Spirit of Saint Louis)’호를 타고 파리로 향하기 전 비행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최초의 대서양 단독비행에 성공한 하늘의 영웅, 찰스 린드버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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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최초의 대서양 단독비행에 성공한 하늘의 영웅, 찰스 린드버그

찰스 린드버그는 홀로 뉴욕 -파리 간을 무착륙 비행한 최초의 조종사입니다. 그 이전에도 대서양 상공을 날아 유럽으로 간 사람들은 있었으나 단독으로 중간에 쉬는 일이 없이 횡단한 것으로는 처음이어서 항공사상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 있습니다.

찰스 린드버그는 1902년 2월 4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변호사에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고,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으로 비교적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늘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컸던 린드버그는 위스콘신대학에 들어갔으나 1년 반 만에 자퇴하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유람했습니다.

평소 하늘을 나는 데 관심이 많았던 그는 네브래스카 주 링컨에서 처음 조종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에 있는 미 육군 항공대에 들어가 비행술을 계속 연마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로벗슨 항공기 회사 (Robertson Aircraft Company)에 취업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종사 일을 시작합니다.

린드버그의 임무는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카고까지 우편물을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직선거리로 약 480여 Km에 달하는 이 노선을 린드버그는 주로 밤에 비행했습니다. 악천후에도 비행을 강행하다 두 번이나 추락해 낙하산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동료 조종사들은 그에게 ‘러키 린디 (Lucky Lindy)’, 운 좋은 린드버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1919년, 뉴욕의 레이먼드 오티그라는 호텔 재벌은 무착륙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하는 사람에게 2만5천 달러를 주겠다는 상금을 내걸었습니다. 요즘 가치로는 38만 달러가 넘습니다. 여러 사람이 시도했지만 한 사람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는 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8년이 지난 뒤 린드버그는 여기에 도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작고 가벼우면서도 연료를 많이 실을 수 있는 항공기를 설계했습니다.

항속거리는 7천200km로, 필요한 비행거리 5천760km보다 훨씬 멀리 만들었습니다. 린드버그의 항공기를 제작하는 비용은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사업가들이 대 주었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항공기의 이름은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즉 ‘Spirit of Saint Louis’호로 명명했습니다.

대서양 횡단 비행 예정일은 1927년 5월 20일로 잡혔습니다. 린드버그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조명탄, 무전기, 전등, 심지어 위험에 대비한 낙하산조차 싣지 않았습니다. 음식과 물도 간단히 하루 한두 끼 분만 실었습니다. 출발하는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기상 전문가들이 대서양 상공의 기상은 좋아질 거라고 말하자 린드버그는 조종간을 잡았습니다.

드디어 ‘Spirit of Saint Louis’는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린드버그는 비와 진눈깨비, 눈 속을 날아갔습니다. 졸음과 배고픔, 갈증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화장실도 없어 용변을 보는 일도 어려웠습니다. 린드버그는 무게 때문에 무전기도 싣지 않아 33시간의 비행 도중 외부와 교신할 수도 없었습니다.

5월 21일 저녁, 사람들은 드디어 린드버그가 프랑스 파리 부근 르루르제 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는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착륙한 비행기의 엔진이 채 꺼지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항공기와 린드버그를 둘러싸고 환호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감격해 울기까지 했습니다.

린드버그는 영웅이 됐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는 그에게 영예로운 훈장들을 수여했습니다. 미국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영예 비행 십자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수도 워싱턴과 뉴욕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이 벌어졌습니다. 린드버그는 비행기로 미국 여러 도시를 돌며 축하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또 미국을 대표해 중남미 여러 나라를 순방하기도 했습니다.

찰스 린즈버그와 그의 아내 앤 머로우 린즈버그.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 린드버그는 미국 대사의 딸 앤 모로우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사랑에 빠지고 1929년 결혼했습니다. 린드버그는 아내에게 비행기 조종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함께 장거리 비행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1932년 이들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쳤습니다. 납치범이 돈을 노리고 뉴저지에 있는 린드버그의 집에서 생후 20개월 된 어린 아들을 납치해 간 것입니다. 10주 후 아이는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범인은 여러 해가 지나서야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린드버그는 구설에도 휘말렸습니다. 2차 대전이 벌어지자 그는 미국이 전쟁에 휘말리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나라들은 강력한 독일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여론은 린드버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역자라고 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제 더는 미국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린드버그는 더 이상 중립론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린드버그는 전쟁 중 미군 항공기를 제작하는 회사의 자문으로 일했을 뿐 아니라 민간인이면서 50회나 비행기를 몰고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린드버그는 비행 외에도 여러 분야에 손을 댔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에는 그곳 의사와 함께 인공심장을 개발했습니다. 그는 또 멕시코 마야 인디언 유적 탐사에도 참여했습니다. 아프리카와 필리핀 문화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자연 보호 운동도 앞장서 전개 했습니다.

찰스 린드버그는 1974년 하와이에서 72세로 타계했습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정직, 용기, 성취를 향한 노력 등 미국 최고의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며 다시 한번 그를 미국의 영웅으로 되살렸습니다.

린드버그의 단발 항공기 ‘Spirit of St. Louis’는 하늘길을 연 기술과 용기의 상징으로 지금도 이곳 워싱턴 D.C.의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