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2)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지난 2009년 6월 프랑스 리옹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미국을 건설한 위대한 미국인들을 만나보는 '인물 아메리카'. 오늘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두 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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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오디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2)

마이클 잭슨은 노래에서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열었습니다. 성공적인 첫 뮤직비디오 역시 음반 스릴러(Thriller)의 노래를 주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약 13분짜리 영상은 음악사상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돼 미국 국회 도서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Thriller’의 성공은 음악계와 방송계에 존재하던 흑인 가수 차별 분위기를 없애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1980년대까지도 미국의 음악 전문 텔레비전이나 공중파 TV, 라디오 방송들 가운데는 흑인 가수들의 출연이나 음악 프로를 기피하는 곳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 워낙 큰 인기를 끌자 이들 방송이 더 이상 그런 태도를 고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음악 방송에서 인종 간의 벽을 무너뜨린 데도 마이클 잭슨의 영향은 컸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Thriller’ 이후에도 계속 ‘Bad’, ‘Dangerous’, ‘역사: 과거 현재 미래 1(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1)’, ‘Invincible’ 등 대작을 내놓았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미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많은 공연을 했습니다. 총 123회, 국가 수로는 한국도 포함해 25개 나라에 달합니다. 공연 관람 인원은 440만 명을 넘었습니다. 공연 때면 그의 노래에 열광하다 기절하는 팬들도 있었고,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부상자도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가 공연을 할 때면 늘 안전에 대한 우려가 뒤따랐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마이클 잭슨의 저택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동화 ‘피터팬’에서 이름을 따온 ‘네버랜드 목장(Neverland Ranch)’은 대지가 약 330만5천여 평이나 되는 큰 규모였습니다. 여기에는 잭슨의 작업실, 녹음시설, 연습장 등은 물론 동물원, 철도, 롤러코스터를 비롯한 각종 오락 시설이 있었습니다. 잭슨은 질병이나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어린이와 그들의 가족, 전 세계에서 온 팬들을 무료로 네버랜드에 초대해 함께 즐겼습니다. 이 같은 초대 행사는 적어도 한 달에 2~4번씩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그토록 인기 있었던 마이클 잭슨이 과연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궁금해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수입은 12살 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자신이 부른 노래의 저작권 수입이 그때부터 발생한 것입니다. 마이클 잭슨의 생존 시 총수입은 약 12억 달러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금 수입 외에 자산가치는 그가 사망한 해 약 5억 달러 정도로 추산됐습니다.

사망한 후에도 저작권료, 광고 계약금 등 여러 경로에서 수입이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Forbes)는 사망한 미국인 중 2017년 가장 많은 수입이 발생한 인물은 마이클 잭슨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두 번 결혼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리사 마리 프레슬리로, 팝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었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의 얼굴 백반증 치료를 하던 간호사 데비 로우(Debbie Rowe)입니다. 데비와의 사이에서는 남매를 두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에게는 생모가 누구인지 공개되지 않은 또 한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생전에 아동 성추행 혐의로 많은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1993년 제기된 민사소송에서는 잭슨이 아이들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소송은 결국 합의로 종결됐고, 형사법 위반 혐의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됐습니다. 2005년에도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이때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잭슨은 피부색뿐만 아니라 코도 낮아지고 얼굴 윤곽도 변화를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가 백인이 되고 싶어 일부러 표백한다고 주장했고, 잭슨은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잭슨은 물론 표백설을 강력히 부인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수입도 많았지만 자선 활동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1965년, 불과 7살 때 형들과 '잭슨5'악단을 하던 시절에도 고향인 개리에서 자선 음악회에 출연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자선활동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하면서도 많은 자선공연을 열었고, 그 수익금 전액을 기부하곤 했습니다.

1999년 서울 공연도 불우 어린이 돕기 자선 공연으로 열렸습니다. 어린이, 불우 학생 돕기, 사회운동, 아프리카 돕기, 동물 보호, 질병 퇴치, 유엔 아동기금 등 지원 대상도 다양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음주운전 방지 운동에 크게 기여한 마이클 잭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감사장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2009년 6월 25일, 50세를 일기로 캘리포니아에서 타계했습니다. 사인은 마취제와 진정제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알려졌습니다. 전 세계의 팬들은 충격 속에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미국의 팬들은 그가 진정한 마지막 우상이었다면서 다른 어느 누구를 이렇게 슬퍼할 수 있을까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럽의 팬들은 유서 깊은 성당에 모여 그를 추모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감옥의 수감자들이 춤을 추며 그를 떠나보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추억은, 여전히 사랑 받는 노래와 함께 팬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