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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 ‘내우외환’ 속 69회 생일


16일로 69회 생일을 맞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1994년 부친인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지금까지 17년 간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강성대국’ 구호를 내걸고 북한을 통치해 온 김 위원장이 주민들에게 빵과 자유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최원기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69회 생일을 전후해 각종 축하 행사를 열었습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방송입니다.

‘21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 만세! 만세!’

지난 1994년 집권한 김정일 위원장의 최대 과제는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북한경제는 90년대 들어 최악의 상태가 됐습니다. 공장과 기업소는 가동이 중단됐고, 연이은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 배급이 중단됐습니다.

평양에서 여맹 위원장을 지내다 지난 2008년 탈북한 최성경 씨는 평양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관할하고 있던 여맹 조직에서도 굶어 죽는 현상이 있었고, 엄마가 장사를 떠난 이후 10살짜리 딸, 9살짜리 아들이 굶어 죽는 일이 있었어요”

김정일 위원장은 두 가지 조치를 통해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우선 내부적으로 선군정치를 통해 군부의 지지를 확보하는 한편 외부적으로는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난을 풀려고 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북한 담당관을 지낸 케네스 퀴노네스 박사의 말입니다.

퀴노네스 박사는 김정일 위원장이 1998년부터 2006년까지 한국과 중국, 유럽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펼쳤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정치적 성과를 거뒀습니다. 2000년 6월 평양에서 김대중 한국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2007년 10월 또다시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난 겁니다. 1차 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 내용입니다.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데, 그래서 김 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한국으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통한 외화 수입은 물론 거의 매년 수 십 만t의 비료와 쌀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 출신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의 말입니다.

“북한은 지난 10년 동안 이명박 정부 들어서기 전까지 한 10억 달러 이상을 지원 받을 수 있었고,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통한 달러를 통해 가난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죠.”

김정일 위원장은 또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94년 미국과 제네바 합의를 맺은 데 이어 2000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미-북 정상회담도 추진했습니다. 또 부시 행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2008년에는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과 대남 도발은 남북관계와 미-북 관계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았습니다. 북한은 지난 해 3월 한국의 천안함을 공격한 데 이어 11월에는 한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남북관계는 정상회담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은 미-북 관계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지난 2009년의 2차 핵실험은 오바마 행정부가 대북 압박으로 정책을 선회한 계기가 됐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경제적 지원을 비롯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면 먼저 한반도 비핵화부터 이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2008년 또 다른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 해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이후 김 위원장은 27살인 셋째 아들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이를 ‘혁명의 계승’이라고 주장했지만, 국제사회는 북한의 3대 세습을 시대착오적인 행태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안찬일 소장의 말입니다.

“최근 이집트와 튀니지 사태를 보면 그런 나라의 시민혁명은 역사가 정지된 상태에서 일어났지만, 17년간 김정일 정권을 보면 역사가 완전히 후퇴한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2009년 말 실시한 화폐개혁은 북한 주민들의 민심이 김정일 정권에서 더욱 떠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시 탈북자 최성경 씨의 말입니다.

“김정일은 인민생활을 방조하지 않고, 인민들은 어떻게 살든지 관계 안 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김정일 시절에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를 강화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 활로를 찾으려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지난 해 이례적으로 5월과 8월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그 결과 북한의 중국 의존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강성대국’을 내걸고 지난 17년간 북한을 통치해 왔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김 위원장이 정권을 유지 하는 데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아직 강성대국은 멀었다고 지적합니다.

북한 정권은 그 동안 주민들에게 ‘이 밥에 고깃국’을 먹여 주겠다고 선전해 왔지만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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