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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주한 미국대사 인터뷰 시리즈 1 ] 도널드 그레그


저희 ‘미국의 소리’방송은 전직 주한 미국대사 3명으로부터 재임 시절 미-한 관계와 북한 핵 문제에 대해 들어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첫 순서로 도널드 그레그 전 대사 편입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 정부 시절인 지난 1989년부터 93년까지 서울에서 근무했습니다. 김연호 기자가 그레그 전 대사를 인터뷰했습니다.

문) 그레그 전 대사님 안녕하십니까. 한국에 부임하시기 전에 70년대 중반 미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도 근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답) 1989년 제가 서울에 다시 갔을 때 75년 당시보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훨씬 나아졌다는 걸 알았습니다. 상호 신뢰가 크게 향상됐고 양국관계가 매우 성숙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동독에 대해 취했던 동방정책을 기반으로 해서 북방정책이라는 이름의 새 대북정책을 추구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우선 북한의 동맹국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로 하고 미국과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듬해 소련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냈습니다. 92년에는 중국이 한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북방정책이 남북한 직접대화의 기반을 닦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도왔습니다.


문) 당시 부시 대통령도 한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을 전폭적으로 지지 했습니까?

답) 물론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한-소 정상회담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당시 부시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테니스를 함께 칠 정도로 아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나중에 노태우 대통령에게 재임 당시 이룩한 업적을 축하하고 노 대통령과 함께 일해 기뻤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문) 부시 대통령이 한-소 정상회담에 직접 관여했다고 하셨는데, 당시 한국과 소련의 직접 협상에 문제가 있어서 미국의 역할이 필요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답)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모두와 훌륭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이 한-소 정상회담을 주선하는 게 편리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과 소련이 고위급 회담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의 관여는 일을 진행하기 위해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문) 중국이 한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데도 부시 대통령이 역할을 했습니까?

답) 그 문제에 대해서도 부시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중국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중국도 부시 대통령을 매우 존경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82년 부통령으로 있을 때 중국을 방문했었는데, 제가 그 때 수행했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남북한의 유엔 가입에 반대하던 중국에 압력을 가해서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외교적 승인까지 가능케 했습니다. 그 직후 한국 주재 중국 대사가 제게 찾아와서 자기는 북한 주재 대사도 해봤지만 평양이 아니라 서울에서 근무하게 된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한국이 서둘러 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문) 한국과 미국이 이런 외교적 공세를 편 데는 당시 북한의 핵 위협이 상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미국과 한국이 외교적 공세를 펼친 건 북한이 뭘 하고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상황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제가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해서 했던 첫 번째 일들 중에 하나는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서 한국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이 왜 전술 핵무기를 한국에 배치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니까 한국 전쟁이 끝난 뒤 계속 배치돼 있었다는 대답을 하더군요. 그래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 거냐고 물으니까 너무 구식이라 절대 사용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문)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났습니까?

답) 그렇다면 핵무기를 한국에서 빼내자고 제가 제안했습니다. 북한에 핵 개발 계획을 중단하라고 요구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북한이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핵무기를 지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지지를 받은 다음에 한국 청와대에 갔습니다. 당시 김종휘 외교안보 수석과 긴밀히 공조했고 노태우 대통령도 제 구상이 현명하다고 곧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서울에 부임한 지 1년 만에 주한미군 사령관과 한국 청와대로부터 핵무기 철수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냈다는 전문을 워싱턴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문) 미국이 핵무기를 철수하면 한국에 대한 군사공약도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를 한국 정부가 했을 법한데, 어떻습니까?

답) 그런 우려는 없었습니다. 저는 리스카시 주한미군 사령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요, 리스카시 사령관은 핵무기 철수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이 약화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한국 국방부 측에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가 강력하고 성숙해졌다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태우 대통령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굳게 믿었고 핵무기 철수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자신의 대북정책에도 도움이 된다는 미국 측의 설명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문) 1991년에 남북한이 기본합의서를 체결하기에 앞서 미국과 한국이 연례 합동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기로 했었죠. 이 결정이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에 얼마나 중대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보십니까?

답) 팀스피리트 훈련 취소는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저는 중앙정보국 서울지부장으로 있을 때부터 북한이 얼마나 팀 스피리트 훈련 같은 대규모 군사훈련을 싫어하고 두려워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팀 스피리트 훈련 취소는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에 중요한 동력이 됐습니다.


문) 하지만 팀 스피리트 훈련이 1년 뒤에 재개되지 않았습니까? 남북관계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습니까?

답)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는 제가 주한 미국대사로 있었던 기간 동안 미국 정부가 내린 최악의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딕 체니 국방장관이 이 결정의 책임자였습니다. 저와는 전혀 협의가 없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앞서 2년 간 진척된 거의 모든 일들이 완전히 흐트러지고 말았습니다.

문) 당시 협의 대상에서 제외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답)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에 제가 반대할 걸 체니 국방장관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의 연례 안보협의회가 끝난 뒤 미국 국방부가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게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입니다.


문) 당시 미국과 한국의 국방 당국이 팀 스피리트 훈련이 취소된 걸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답) 군 인사들은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이 한국을 방위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한국 군 일부에서는 팀 스피리트 훈련을 그 때 상황의 재연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팀 스피리트 훈련의 재개를 원했던 군 인사들이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지했고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을 모두 무시했습니다. 현재 북한과의 문제는 미국이 이렇게 대북정책에서 연속성을 보이지 못했던 것과 상당부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그레그 전 대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진행자: 지금까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로부터 재임 시절 미-한 관계와 북한 핵 문제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미국의 소리’ 방송이 마련한 전직 주한 미국대사와의 인터뷰 시리즈, 내일은 제임스 레이니 전 대사와의 인터뷰를 보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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