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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특집 1] 글리니케 다리의 추억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독일 베를린의 장벽이 붕괴된 지 오늘 (9일)로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오늘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베를린 장벽의 수립과 붕괴 배경, 이후의 변화 등을 살펴보는 특집방송을 보내드립니다. 오늘은 첫 번째 순서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유를 살펴봅니다.

독일 베를린 시 외곽의 글리니케 다리. 이 철제 다리는 푸른 하펠강 (Havel River)을 가로질러 고풍스런 베를린 시와 이웃 포츠담 시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푸른 강물과 하늘, 신록과 붉은 색깔의 중세 교회를 배경으로 시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내는 이 글리니케 다리의 이면에는 어두운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글리니케 다리는 과거 동서 냉전이 극에 달한 시기에 서방국가와 공산국가 간에 비밀요원들을 교환하는 '간첩의 다리'로 불렸습니다.

포츠담 시에 거주하는 하이오 쾰링 씨는 포로 교환과 관련한 얘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쾰링 씨는 포로 교환이 바로 글리니케 다리에서 이뤄졌다고 말합니다. 한쪽 군 검문소에서 다른 쪽 군 검문소로 비밀요원들이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61년 이후 이 다리는 민간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존재하지 않는 다리'였다고 쾰링 씨는 말합니다. 그 해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그 외 동독으로부터 분리하는 베를린 장벽이 건설됐기 때문입니다.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동독 주민의 서독 탈출을 막기 위해 베를린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는 장벽을 건설합니다. 베를린 장벽은 이후 베를린시 뿐만 아니라 서독과 동독을 분리하는 장벽으로 보강됩니다.

하지만 냉전의 상징이자 독일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가장 극명한 변화의 징조는 바로 1980년대 소련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정치 분석가인 요헨 슈타트 씨는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잡았을 당시 가장 중요한 변화의 징조는 소련 연방에서 독일의 통일에 대해 공공연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련과 동독 간에 차이가 벌어졌고, 공산 동독 지도자들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분리의 틈을 서방의 지도자들이 메꾸기 시작했습니다.

지난1987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베를린 장벽 해체를 요구했을 때는 이미 개혁의 움직임과 변화의 물결이 소련 연방에서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1989년, 동독인들은 헝가리를 통해 서방으로 대거 탈출했고 동독에서는 평화 시위가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베를린 장벽 붕괴는 소련이 동독을 겨냥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런던 정경대의 정치 분석가 마이클 콕스 씨는 고르바초프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베를린 장벽은 지금부터 꼭 20년 전인 1989년11월 9일, 모든 사람들의 예상 보다 훨씬 빨리 무너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곧 이어 동독 공산정권도 와해됐고, 독일은 이듬해 통일을 이뤘습니다. 이어 소련 연방도 붕괴되면서 냉전체제는 명실공히 막을 내렸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1961년부터 해체되기까지 28년 간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으려다 목숨을 잃은 동독 주민의 수는 1천 명을 넘습니다.

지금 글리니케 다리를 건너는 하이오 쾰링 씨의 삶에도 그동안 변화가 있었습니다. 구 동독 시절 포츠담시 소속 도시계획 전문 건축사로 일했던 쾰링 씨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개인 건축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은퇴한 쾰링 씨는 이제 글리니케 다리를 자유롭게 건너고 있습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조성됐던 과거의 모든 장벽과 검문소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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