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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케네디의 생애와 발자취


미국 정치의 버팀목으로 불리우던 에드워드 케네디 연방상원 의원이 1년 동안의 암투병끝에 25일밤, 생을 마감했습니다. 고 존 F 케네디 대통령 형제들중 막내였던 케네디 의원은 사회복지 정책, 인종차별 종식 등 여러 분야에서 형들의 정치이념을 계승해 적극 추진했던 진보적 정치인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에게 적지않은 논란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케네디의원의 생전의 정치적 생애를 조명해 봅니다.

고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진보적 대의의 챔피언으로서 상원의원 재직중 근로자들의 권리와 교육재정, 외교정책, 이민법 등 많은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법안들을 앞장 서 추진했습니다. 고 케네디 대통령의 딸 캐롤라인 케네디는 삼촌인 에드워드 의원을 애칭인 테디라고 부르면서 그는 케네디 가문의 귀감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테디 삼촌은 상원의원으로 40 여년간 봉직하면서 민권과 사회정의, 경제적 기회 등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일들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왔다고 캐롤라인은 지적합니다.

고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 행정부의 이라크 정책을 앞장서 반대했고 부시 행정부의 테러 용의자들에 대한 심문기법과 테러와의 전쟁 수행 등을 거리낌없이 비판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2007년에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입장을 강조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상원에서 이라크 전쟁관련 표결에 자신은 반대표를 던졌다 면서 이라크 전쟁은 적절치 않은 시기의 옳지않은 전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그러나 민주당의원으로서 당을 초월해 공화당과 법안을 타협하기도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케네디 의원은 2008년에 바락 오바마 의원을 개혁의 기수로 여겨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경쟁에 나선 오바마 의원을 지지하고 나선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변화를 선택하는 용기를 갖고 역사적인 여정에 동참할 것을 동료 민주당원들에게 촉구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가 요청되는 때라면서 바로 지금은 바락 오바마의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이 처음 상원에 진출한 것은 1962년 큰 형, 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 1년전이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형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통해 형은 사후에 실제 생애이상으로 영웅시될 필요가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형은 단지 잘못된 것을 보고 그것을 바로잡으려 했던 선량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케네디 의원은 추도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1968년에 바로 윗형인 로버트 케네디 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선거유세에 나섰다가 암살되면서 또다른 가족사의 비극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로버트 케네디의 죽음으로 케네디 형제의 가장 나이어린 막둥이에서 갑작스레 가문의 정치적 지주로 발돋음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에겐 백악관으로 가는 길이 훤히 열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케네디 의원은 1969년에 자신이 운전하던 자동차가 다리에서 물로 추락해 차에 타고있던 젊은 여성이 숨지고 자신은 살아남은 사건 때문에 대통령 꿈은 접어야 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자동차 추락사고를 여러 시간이 지나 뒤늦게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온갖 의혹들이 불거져 나왔고 그 때문에 정치적 공인으로 위상에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은 대통령 꿈을 버려야 했을뿐만 아니라 상원의원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하는지 출신지인 매사추세츠주 유권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케네디 의원은 당시 결정은 단독으로 해리기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로부터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가 쇄도했고 1980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지명 경쟁에 나섰다가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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