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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메리칸 드림 ] 고준경 씨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시 인근에 있는 에드레디스 공원.. 최근 이 곳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광장에 특별한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 작전에서 최초의 미군 전사자였던 발도메르 로페즈 중위를 기리는 기념비입니다.

이 기념비가 세워진 데는 한인 사업가 고준경 씨의 공이 큽니다. 플로리다주 탬파시에 거주하고 있는 고준경 씨는 로페즈 중위가 탬파 출신이란 사실을 알고 사재를 털어가면서 기념비 설립을 추진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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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경 씨: “그 사람이라는 건 내가 인천서 상륙 당시에 있었던 일이니까 옛날부터 알고 있었는데.. 탬파에서 살면서 보니까 여기 출신이야. 여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래서 그 사람 메모리얼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가지고...”

고준경 씨는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학도병으로 지원해 미군의 첩자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 때 인연을 맺었던 미군 병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을 당시, 고준경 씨는 중학교 3학년생이었습니다. 혼란 속에 부모와 헤어진 고준경 씨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친지를 찾아갑니다. 그 곳에서 고준경 씨는 평생 잊지 못할 참담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고준경 씨: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에 이렇게 들어가니까 인민군들이 벌써 들어와 있어. 들어와 있는데 그 때 우리 국군이 일선에서 다친 사람들이 와가지고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다들 거기서.. 그런데 인민군들이 오더니 그 군인들을 광장에다가 내려와서 한 1백명 이상되는 환자를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서 죽이더라구.. 그게 내 일생에 제일 불만과 복수심이 거기서 내가 그걸 받았다고…”

뭔가 하지않으면 안되겠다고 느낀 고준경 씨는 학도병으로 나설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있던 미군에게 북한군의 위치를 알려주는 첩자 역할을 하게 됩니다.

고준경 씨: “그때 마침 인천에 있는 친구가 나보고 ‘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생겼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하려고 8월말에 유진 클라크란 사람을 보냈다고 그리로..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을 도와줬다고..”

학생 첩자들이 주는 정보에 힘입어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미 1군 해병대 사단은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합니다. 미군이 북으로 북한군을 몰아내는 동안 고준경 씨는 동쪽으로 북상하며 미군의 첩보원 역할을 계속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 속에 여러번 북한군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고준경 씨: “몇번 붙잡혔었어, 나도… 사정사정하고 울면서 미국 사람들 내가 따라 다니는 게 아니다, 난 여기 뭐 얻어 먹으러 왔다 그러니까, 울고 그러면 잘 놔주더라고..”

고준경 씨는 전쟁 기간 동안 미군들을 따라다니고 함께 싸우면서, 몇몇 병사들과는 형과 아우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습니다. 고준경 씨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들과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았다고 말합니다.


고준경 씨: “그랬더니 자기네들이 서로 연락을 해가지고 셋이 만났어, 거기서.. 만나 가지고 이제 의논을 한 거라. 어떻게 하면 나를 데려올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사람들이 콩그레스맨 (하원의원)을 찾아갔다고…자기네들..”

당시 뉴저지주 하원의원이었던 휴 에르니지오 의원은 이들의 사연을 듣고 고준경 씨를 미국으로 초청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고준경 씨는 멀리 미국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지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동네를 걷던 고준경 씨는 미군 지프차와 마주칩니다.

고준경 씨: “그 운전수가 그러더라구.. 여기 이런저런 사람 있냐고… 들어보니까 나 같애.. 그래서 있다고, 나라고 그랬더니, 당장 올라 타래. 영사관에 가재.”

미국 영사는 어리둥절한 고준경 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빨리 미국으로 떠나라고 권합니다. 영사관 건너편에 있는 미국 항공사에는 이미 미국의 친구들이 돈을 모아 사서 보낸 비행기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사천리로 수속이 진행되면서 고준경 씨는 보름 만에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고 고준경씨는 회상합니다.

고준경 씨: “하늘 나라로 오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지.. 천국에 오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었지.”

1955년 뉴저지주 뉴욕 국제 공항에 도착한 고준경 씨는 마중 나온 세 미국 청년들과 상봉했습니다. 베이질 골드맨, 잭 루트, 해리 엘더, 이들 한국전 참전 군인들은 모두 제대해서 직장에 다니며,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고준경 씨는 그 중에서 가장 큰 집에 살고 있던 해리 엘더 씨의 집에 들어가게 됩니다.

고준경 씨: 자기 엄마 아버지가, 미국에는 집에 애틱 (다락)이라는 게 있어. 그걸 도배질을 하자고 그러더래, 자기 보고...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거기 와서 거기에 있게 하면 안되냐고 그러더래… 난 특별한 손님인데 내가 걔를 거기 있게 못 한다, 나하고 같은 내 방을 쓴다..”

해리 엘더 씨는 한국에서 온 소중한 친구를 다락에 머물게 할 거라면 차라리 자신이 집을 나가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덕택에 고준경 씨는1955년부터 62년까지 약 7년 동안 해리 씨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됩니다. 고준경 씨는 미안한 마음에 미군으로 자원해서 2년 동안 나가있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주한미군으로 발령 받아 문산의 미군부대에서 근무했다는 것입니다.

고준경 씨는 군대에 다녀온 뒤 낮에는 백화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강의를 들으면서 대학과정을 마쳤습니다. 졸업후 미국 회사에 취직했지만 은근한 인종차별에 시달렸다고 고준경 씨는 말합니다.

고준경 씨: “그래서 내 생각으로 직장에서 인종차별 할 때는 사업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그래서 엑스포트 앤 임포트 (수출입) 비지니스를 시작했다고..”

조금씩 회사를 키우면서 사업하는 재미을 맛보던 중 고준경 씨는 친구의 소개로 아내 조애나 고 씨를 만나게 됩니다.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던 조애나 씨는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준경 씨의 따뜻한 사랑은 오랜 독신주의자였던 조애나 씨의 마음을 녹였고, 1972년 결국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합니다.

조애나 고 씨: “전 처음 까다로운 사람이었어요. 성격 자체가 까다로웠어요. 그런데 우리 바깥 양반이 항상 세상이 둥근 타원형이지, 모나게는 살지 말어, 모나게는 살지 말어, 그러더라구요. 만나다 보니까 정이 들고, 그렇게 해서 사랑하게 됐죠.”

고준경 씨: “사람이 말이 적고 수다스러운 것도 없고, 거기에 마음에 들더라구요.살면서 자꾸 더 좋은 걸 더 발견하게 되고… 무지무지하게 행복하죠, 이제..”

결혼후 고준경 씨는 무역업을 계속하고, 부인 조애나 고 씨는 보석상과 모피사업에 손을 대 성공하면서, 고 씨 부부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즐겼던 두 사람은 경영난을 겪고있던 플로리다주 탬파의 골프장을 인수합니다.

조애나 고 씨: “난 잘 되는 거는 사기 싫고, 안 되는 거 사서 일으키는 거, 거기에 챌린지(도전)가 있는 거 아니에요?”

검은 머리, 노란 피부의 동양인 부부가 백인 동네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사무실로 찾아온 동네 주민들은 석달도 되지않아서 손을 들고 나가게 될 거라며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 씨 부부는 밤낮으로 열심히 뛰면서 골프장을 흑자로 돌리는데 성공합니다.

조애나 고 씨: “1년 되니까 또 찾아왔어요. 정말 놀랐다, 너희 부부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인지 몰랐다고.. 자기네 미안함을 정말 억셉트해 달라고 (받아들여 달라고) 그러더라구요.”
남편은 밖에서, 아내는 안에서 열심히 뛰던 어느날, 골프를 치러왔던 한 손님이 고준경 씨에게 다가왔습니다. 한국전 참전군인 출신이라고 밝힌 이 미국인은 이제껏 아내에게도 하지않았던 얘기들을 고준경 씨에게 털어 놓습니다.

고준경 씨: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스터 (부활절) 때 자기 부인이 보내준 양말을 신고,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그걸 벗어가지고 씻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구.. 그러니까 자기 부인이 하는 말이 너 나한테 그런 말 안 했지않느냐, 나한테 그런 말 안 하더라 그렇게 얘기해. 그러니까 내가 뭘 그런 말을 하냐 하면서 수줍어 하더라고.. 그걸 보고 내 속으로 그랬어. 정말 얘기를 안 하는 구나, 이 사람들이…”

한국전 참전 군인들 가운데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조차 전쟁터에서 힘들었던 얘기를 털어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깨달은 고준경 씨는 한국전쟁에 나갔던 미국인들이 함께 모여 속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고준경 씨: “이 사람들이 모이는 기회를 만들자, 우리가 하루를 문을 닫고… 6.25 참전용사들을 위해서 우리가 하루를 문을 닫고, 이 사람들이 골프를 치고, 스테이크 디너를 주고, 점심 주고 다 주고, 이렇게 해서 하루를 이 사람들을 위해서 했다고..”

이렇게 1994년에 처음 시작된 한국전 참전 미군 위로행사는 1999년까지 7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참가자 수가 계속 늘어나면서 플로리다주는 물론 미국 동부 전역에서 3백여명의 미국인들이 모였는데요. 하지만 부인 조애나 고 씨가 큰 수술을 받게 되고, 고준경 씨의 건강 또한 악화되면서 더 이상 행사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리고 고준경 씨 부부는 지난 2006년에 골프장을 정리하고 은퇴했습니다.

한국전쟁중에 만난 미군들과의 인연으로 미국에 온 고준경 씨… 단돈 20달러를 들고 미국 땅을 밟았지만 골프장을 인수해 운영했을 정도로 자수성가를 이뤘습니다. 고준경 씨는 전쟁의 폐허속에서 자신을 건져내 어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게 해줬던 미국인들과 미국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에서는 꿈이 있는 한,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는 한, 어떤 일이든지 가능하다고 고준경 씨는 말합니다.

:고준경 씨: “이 나라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거…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이 나라는 뭐든지 할 수 있다, 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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