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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3 % 의 이방인들-영국 내 탈북자’


지난해 영국에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들이 갑자기 봇물을 이뤄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제 3국이 아닌 한국에 이미 정착했던 한국 국적 탈북자들인 것으로 알려졌고, 전체 숫자는 3백~3백50 명에 달하는 것으로 영국 내 여러 소식통들은 추산하고 있습니다. 한국 내 탈북자 1만 2천여명 가운데 3% 에 달하는 이 탈북자들이 왜 꿈에 그리던 한국땅을 버리고 다시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영국으로 들어갔는지, 또 이들의 영국 내 삶은 어떤지 김영권 기자가 영국에서 탈북자들을 만났습니다.

이 곳은 런던 시내 중심가인 피카디리 광장 앞.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동양 청년이 뚜렷한 목적지가 없는 듯 빗물을 튕기며 떠나는 빨간 이층버스의 뒤를 하염 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한 명문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올해 22살의 탈북자 김일철 씨. 그가 이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 입국한 지도 이제 석달째가 돼 갑니다.

“마음 먹고 결심해서 온거니까 견딜려고 해서 그렇지 솔직히 만족하거나 여기가 좋다거나 그런 느낌을 별로 없어요. 여기 생활하는 환경이나 여러 가지 솔직히 적응이 안되요”

한국에 정착했던 과거를 숨긴 채 영국 정부에 망명을 신청한 김 씨는 영국 당국이 지정해준 웨일즈의 카디프 시를 떠나 맨체스터로, 그리고 다시 일주일 전 이 곳 런던으로 도시를 이리저리 전전하고 있습니다.

“처음 왔을 때 느낌이 너무 낯선 게 차갑게 느껴져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서양이 선진국이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이 개방되고 발전됐는데 어쩌면 그런 것에 적응이 안돼요. 선진국일수록 매너있고 교양적일지 알았는데 젊은층은 더 안그런 것 같아요.”
김일철 씨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 고향 함경북도를 떠나 중국에서 홀로 6년을 보내며 체포와 강제북송, 재탈출을 반복한 끝에 지난 2004년 꿈에 그리던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그리고 대안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한 끝에 2년만에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지난해 특별전형을 거쳐 한 명문 사립대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학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매우 벅찼다고 말합니다.

“남북한이 차이가 심하게 나니까 따라가기 더 힘드니까 일단 결심한 게 차라리 내가 여기서 이들하고 경쟁하기 보다는 좀 더 낫고 발전한 선진국가에서 거기에 해 봐서 다시 돌아오면 못해도 이들만 하지 않겠나 해서 왔어요.”

맨체스터에서 만난 20대의 또 다른 탈북자 오대성 씨는 고등학교 졸업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 한국애들 따라갈 수 없어요. 걔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체계적으로 공부만 하던 얘들이고, 탈북자들은 대부분 중국을 거쳐서 놀다가 뭐 이렇게 들어와 공부하려고 해도 다시 따라간다는 것이 사실 힘들구요.”

두 탈북자처럼 한국의 학교 또는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 곳 영국에 온 20대의 탈북 젊은이들은 전체 영국 내 탈북자의 절반을 훨씬 넘는다고 이 곳 소식통들은 말합니다.

한국 출신 탈북자들의 영국 망명 신청이 봇물을 이룬 것은 불과 1년전부터입니다. 편법을 통해 영국에서 망명신청을 한 일부 탈북자들이 브로커로 본격 나서면서 한국 내 탈북자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김일철 씨 역시 탈북자에게 한국돈 2백만원을 건네주고 영국에 들어왔습니다.

“ 한 사람이 적게는 한 명에서 많게는 열 몇 명씩 데려오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이 들어와서 보니 너무 간단하거든요. 아 내가 돈을 괜히 주지 않았나. 니들 쉽게 했으니 나라고 못하겠나..하면서 다 브로커 하려는 거예요.”

브로커들의 과장선전과 한국 내 삶에 피곤했던 탈북자들의 의존심리가 맞아떨어지면서 영국에 발을 내딛는 탈북자들의 수는 특히 지난해 하반기들어 부쩍 더 늘었습니다.

영국은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들에게 정착지역을 선정한 뒤 임시주택을 제공하고 연령대별로 최소 주당 32파운드, 그리니까 미화로 60 달러 정도를 지급합니다. 망명 비자를 발급 받으면 자유롭게 취업이 가능하고 생활지원금도 조금 늘어납니다. 그러나 많은 탈북자들이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학생들이 많이 찾는 영국 중부 도시의 한 한인교회!

신도 80여명이 모이는 이 교회에 탈북자들이 하나 둘 모여 들면서 이젠 등록 탈북자가3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 교회의 J담임목사는 탈북자들이 정착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합니다.

“ 일단 직업을 찾으려고 해도 영어가 안되니까 아무 것도 못하고, 비자를 받으면 일을 할 수 있는데 일을 하게 되면 베네핏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 교회를 찾았던 탈북자 가운데 4분의 1은 이미 정착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으며, 남아 있는 탈북자 중 대부분도 아직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정부가 학비를 제공하는 영어학원 또는 대학의 영어 프로그램은 신청자가 많아 스스로 발로 뛰지 않으면 수강하기가 힘듭니다. 이라크와 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 출신 난민들은 영어를 조금 구사하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와 직장을 빨리 찾지만,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탈북자들은 통역만을 의존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중국 등 제 3국과 한국에서 도움을 받아온 의존적 습관 때문인지 자발적으로 도전하려는 모습도 찾기 힘듭니다.

영국 중부의 이 한인 교회는 지난해 10월부터 일요일마다 탈북자들을 위한 영어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방문한 날 영어교실을 찾은 탈북자는 고작 2명, 수업이 끝날 때쯤 다른 2명이 어슬렁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어를 배우려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왔지만 이젠 의지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런던에서 만난 김일철 씨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 이렇게 와서 한동안 정부가 제공해 준 시설에 있다보니 외롭고 힘들고..다 경험해서 집 밖으로 와 보니 밥을 해 먹을 기력조차 없는 거예요. 아예 굶고. 올 때는 마음에 굴뚝같이 한국말 안하고 영어 쓰겠구나 ..그런 생각이 되게 좋았는데..”

한국 국적 탈북자가 영국에서 망명을 신청하려면 한국에 정착한 사실을 숨겨야 합니다. 영국과 미국 등 대부분의 나라는 자유세계에 이미 정착한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광 등의 목적으로 영국에 입국한 후 탈북자들은 여권을 브로커에게 주거나 숨기고 제 3국에서 바로 입국한 것처럼 속여 망명을 신청합니다.

많은 탈북자들은 그러나 법을 어기고 거짓말을 하며 영국에 망명신청한 사실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맨체스터에서 만난 한 탈북자의 말입니다.

“글쎄요 양심에 찔린다든가 그런 일은 별로 없었어요”

탈북자들은 또 끼리끼리 모여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메뚜기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기는 꺼려합니다.

“탈북자들 많이 있는 곳을 별로 안 좋아해요. 교회 가서도 탈북자들한테 얘기 안하고 예배만 드리고 와요”

그러나 이런 탈북자들을 그저 비난만 할 수 없습니다. 많은 탈북 청소년들이 가난과 기아로 어려서부터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고, 부모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생활을 반복해 왔기 때문입니다.

탈북자 30여명이 출석하는 영국 중부지역 한인교회의 J 목사는 탈북자들이 영국에서 가정의 소중함과 자신감을 회복하길 소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또 자기의 대해 긍정할 수 있는 마음들이 필요하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자존감을 갖는다면 스스로 자기에 대해 존중하고 남들도 존중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어요.”

영국의 겨울은 대개 흐리고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의 연속입니다. 탈북자 가운데 극히 일부는 이제 영국생활에 적응하며 보따리를 풀고 있지만 대다수는 보따리를 다시 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영국주재 한국대사관에는 한국행을 위해 여권을 다시 발급 받으려는 한국 국적 탈북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김일철 씨도 곧 서울로 돌아갈 계획입니다. 그런면서 혹시나 자신의 전철을 밟을 다른 탈북자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남깁니다.

“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한 길, 한 우물을 파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또 뭔가 좋은 것을 바라고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조건이나 형편을 따지다 보니까 자꾸 다른 것을 찾아 가는데 그 보다는 일단 말이 통하고 일단 모든 혜택을 한국이 가장 잘 해줬으니까 거기서 뭔가를 하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런던에서 미국의 소리 김영권 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김영권 기자와 함께 영국내 탈북자들에 대한 영국과 한국 정부의 입장, 그리고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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