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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 억류된 국군포로 데려올 시간 많지 않아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에 대한 최근 한국 정부의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당사자들은 물론 그 가족들의 불만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우선 국군포로와 납북자 가족들은 이달 중 금강산에서 열리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제외됐습니다. 또 이달 초에 열렸던 남북정상회담에서는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문제가 거의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존재 조차 사실상 잊혀진 채 반 세기를 북한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사선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들은 남아있는 동료들을 데려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조은정 기자가 한국 내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들의 얘기를 자세히 전해드립니다.

북한의 아오지 탄광에서 47년 간 강제복역하다 지난 2000년 고향으로 돌아온 허재석 씨는 한국에 있는 형제들과 연결이 돼 중국을 통해 귀환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 남아 있는 고령의 국군포로들이 자력으로 한국에 돌아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몇 사람 없어요. 몇 사람 없는데 이 사람들이 올 생각도 못하고 있지 뭐요. 그 사람들이 저쪽에서 두만강을 넘어 오자면 돈이 들어야 되거든. 중국에 와서도 숨어다니면서 한국하고 친척들하고 연결해서 수수료를 물어줘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올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대체로 남아 있는 사람도, 나이 적은 사람이 76, 75살 이렇단 말입니다. 그 이상인데 북한 식량난으로 굶어 죽고 이러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몇 사람 없지 뭐요.”

현재까지 한국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는 70명입니다. 이들은 전쟁 이후 탄광 등에서 고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탈북 중개인들의 도움으로 돌아오게 됐습니다. 허재석 씨에 따르면 국군포로의 첫 귀환은 지난 1994년에 있었지만, '98년 이후부터 북한에 생존한 국군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한 방법들이 적극 모색됐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체 70명의 귀환자 중 단 2명만이 '98년 이전에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2004년 탈북했다가 중국 공안에 의해 강제북송된 국군포로 한만택 씨의 경우처럼, 국군포로들이 중개인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큰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한국 국방부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실종된 국군의 전체 규모는 1만 9천명에 이릅니다. 이 중에는 미송환 국군포로가 다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국 정부는 탈북자들과 귀환 국군포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현재 북한에 억류돼 있는 5백60명 국군포로의 신상을 확인했습니다.

한국 측은 지난 2000년 제 1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 공작원을 포함해 사상전향을 거부해 온 62명의 정치범, 즉 비전향 장기수들을 북 측에 넘겨주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에 상응하는 조치로 국군포로들을 송환받기 위해 2000년 이후 장관급 회담과 적십자 회담 등을 통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측은 납북자와 국군포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자진해서 북한으로 넘어간 ‘의거자’만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세기 가까이 함경남도 검덕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2000년 귀환한 유철수 씨는 북측의 이러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고향의 부모형제를 버리고 탄광에서 강제 노역을 하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상식적으로 존재하겠냐는 것입니다.

유철수 씨는 북한 측이 국군포로의 존재를 없애려고 도입한 정책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1956년, 북한은 내각결정 143호를 발표해 포로수용소를 해체하고 공민증을 나눠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목상 북한주민이지, 강제노동은 계속됐고 차별대우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은 공민증 줬다고 하면서도 북한 공민들 중에서 최악의 대우를 하고 차별하고 본래 있던 북한 공민하고는 절대적으로 차별했단 말이오. 본인은 국군포로니까 차별했다 하더라도 거기서 태어난 2세까지 차별한단 말이야. 그러고 광산에 한번 들어가거나 탄광에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를 못해요. 이주라는 건 못하게 돼 있고. 거기서 태어난 자식들도 탄광에서 아버지가 고역 치렀던 곳에서 일을 시켰단 말입니다.”

유철수 씨는 처음 포로로 붙잡혔을 때는 한국 정부나 국방부가 찾아줄 것으로 믿고 계속 기다렸지만 몇 십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초기에는 반항하다 총살이나 처형을 당한 국군포로들도 많았지만, 1956년에 북한에서 공민화를 추진하자 당시 20대였던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체념하고 가족을 이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까지도 국군포로 중 장교 출신이나 불만자들을 색출해 어디론가 끌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고 회고합니다.

유철수 씨는 한평생을 고향으로 돌아오길 바랬던 국군포로들을 이제는 보내줘도 되지 않냐고 말했습니다. 국군포로 문제와 같은 지나간 남북간 상처가 먼저 치유 돼야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유 씨의 생각입니다.

“의지가 첫째는 없다는 거 한국 정부가. 두번째로는 북한도 진정한 화해 하려는 의사 없다고 생각. 부려먹을대로 부려먹을 늙은이 왜 없다 하는가 본인들 죽어서라도 고향에 묻히고 싶다는 사람들 가라고 보내줘야 하는데 문제 제기하면 북한에 국군포로 없다. 또 없다고 해서 그걸 강력한 요구 못하는 한국 정부도 답답. 반드시 문제 해결을 해서 화해해야 평화정착 인도 문제 해결된다.”

이달 초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제기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를 11월에 열릴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다시 거론할 계획이라고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은 밝혔습니다.

그러나 피랍탈북인권연대의 도희윤 대표는 국방장관 회담에서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와 관해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심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 정권의 속성에 비춰 봤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인정하지 않는 문제를 국방장관 회담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피랍탈북인권연대를 비롯한 4개 납북자 관련 단체들은 남북정상회담 다음 날부터 청와대 앞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17일부터 5일 간 금강산에서 열릴 예정인 제 16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지금까지 특수이산가족으로 참여했던 납북자와 국군포로 가족들이 제외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국군포로들은 `미국의 소리'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한국으로 귀환한 70명 가운데 15명이 사망했다며, 나머지 또한 고령이어서 북한에 남은 동료들을 위한 구명운동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안타까움을 밝혔습니다.

미국의 소리 조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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