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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문제, '부쉬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 아니다'


북핵문제는 한번도 부시 행정부의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으며 미국의 대북한 정책에 있어서 논리가 결여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미국의 한 전직 고위관리가 한 학술 토론회에서 말했습니다.

이곳 워싱톤에 위치한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이 주최한 이 북핵 학술 토론회에서는 또, 북한의 핵프로그램에 대한 현황 보고와 1994년 일차 북핵 위기시 이뤄졌던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회담에 대한 회고도 있었습니다. 취재에 유미정 기잡니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고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난 9일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하자 유엔 안보리는 대북한 제재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 시켰습니다.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대북한 결의에 들어있는 제재 방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주변국들의 협력을 얻고자 최근 동북아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등 북한 핵실험의 파장은 일파 만파로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곳 워싱톤에 위치한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에서는 최근 ‘북핵 프로그램의 초상’이라는 북핵 관련 학술 토론회가 열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토론회에서 데이비드 스트로브 (David Straub) 전 국무부 한국과장은 지난 5~6년간 미국의 대북정책은 일관된 논리가 없고 실행에 있어서는 자신감이 결여됐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스트로브씨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일관성이 결여된 이유는 북한 문제가 한번도 부시 행정부의 최우선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트로브씨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콜린 파웰 당시 미 국무부 장관에 관한 책, ‘콜린 파웰의 인생(The Life of Colin Powell)’을 인용하면서 미국 정보부는 북한이 1994년의 <기본합의, Agreed Framework>를 위반하고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2003년 자신은 이라크문제에 집중할 것이기 때문에 북한문제를 국무부에 맡겨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스트로브씨는 자신은 콜린 파웰 전 국무장관이 북한과의 양자회담을 원했던 것으로 확신하지만 부시 행정부 내 많은 고위 관리들은 북한을 극도로 혐오해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를 <기본합의>의 끝장으로 간주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미국측의 주장과는 달리 6자 회담에서 고립된 국가는 북한이라기 보다는 미국이었다고 스트로브씨는 말했습니다. 6자회담에서 중국·러시아·한국은 북한이 미국의 위협을 받고있다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했고 이 때문에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을 고립시켜려던 미국은 오히려 융통성 부족으로 고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스트로브씨는 근본적인 문제는 양자 협상이냐 6자 회담이냐가 아니라 부시 행정부가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했을 때 받게 되는 혜택에 대한 로드맵을 지금까지 한 번도 제시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스트로브씨는 <기본합의>에 관한 구태의연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이행 시기와 당사자를 정하고 그 가운데서 6자 회담뿐만 아니라 더 강화된 양자 회담을 가짐으로써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핵 전문가인 미 과학국제안보연구소의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David Albright) 소장은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의 현황에 관해서 북한은 4개에서 13개의 핵폭탄을 만들만한 양의 플루토늄을 분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소장은 자신의 의견은 북한이 4개에서 13개 사이의 중간치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 만한 양의 풀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최근 북한이 핵실험을 실시한 것으로도 입증된다고 말했습니다. 즉, 북한은 한번이나 두번 정도의 핵실험을 해도 괜찮을 정도의 충분한 플루토늄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추가 핵실험 가능성에 관해 올브라이트 소장은 지하 핵실험 자체만으로는 미국에게 위협이 될 수 없으므로 북한이 핵탄두를 탑재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대기권 내의 핵실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올브라이트 소장은 1970년 대 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접 적대국인 앙골라 내의 쿠바 반군을 지원하는 소련을 저지하기 위해 지하 핵실험을 실시한 후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대양 상공에서의 대기권 실험을 실시할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지’라는 측면에서 남아공과 유사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북한이 이와같은 전략을 구사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올부라이트 소장은 덧붙였습니다.

마지마으로 북핵 1차 위기 당시인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보좌관 자격으로 방북해 김일성 국가 주석을 만나고 돌아온 마리온 크릭모어 (Marion Creekmore) 대사는 김일성 주석과의 역사적인 회담 결과는 뜻밖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크릭모어 대사는 그 자리에서 부하관리들의 결정을 뒤짚고 북한의 주요 정책을 극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김일성 주석 밖에 없는 것이 확실해 보였고 이는 특히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 관련해 최고위급 회담의 절실한 필요성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당시 IAEA의 공식 탈퇴를 선언하고 미국과의 무력 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었고 이에 미국은 북핵 시설에 대한 정밀 폭격을 결정하는 등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은 카터 전 대통령에게 북한의 핵시설 동결과 추방 예정인 IAEA 사찰관 2명의 잔류를 허용할 의사를 밝혔습니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남북 정상회담을 요청했고 한국의 김 영삼 대통령은 조건없는 정상회담을 수락했지만,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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