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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김명희씨가 말하는 중국내 탈북여성들이 처해있는 참혹한 인권실태 [탈북자 통신: 김민수]


오는 27일 미국국회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동아시아 태평양문제 소위원회와 국제 인권및 아프리카 소위원회공동으로 개최될 예정인 청문회에서 증언하도록 초청받은, 탈북여성, 김명희씨로 부터 중국내 탈북여성들이 처해있는 참혹한 인권실태에 관해 들어봅니다. 보도에 서울에 있는 [김민수]통신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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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들보다 몇 배로 처참한 환경에서 살고 있고 몇 번씩 팔려가는 탈북 여성도 많았습니다.”

98년 북한을 탈출한 김명희(가명, 함경북도 ○○군) 씨의 말입니다. 김씨는 당시 24살, 21살, 18살의 딸들이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했던 피눈물 나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탈북 여성입니다. 김명희 씨는 중국 내 탈북여성들의 인권 실태를 증언하기 위해 27일 미국 워싱턴에서 미연방국회 하원의 국제관계 위원회, 동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 인권 소위원회에서 주재로 열리는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할 예정입니다. 김씨를 만나 청문회에서 증언할 중국 내 탈북 여성들의 인권실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90년대 중반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김명희 씨 가족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던 어느날 김씨는 식량이라도 마련해 볼까하며 중국으로 탈출한 큰 딸에게서 “중국에 그냥 남아 돈을 벌어서 식구들을 돕겠다”는 편지를 받게 됩니다. 큰 딸이 걱정된 김씨는 딸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탈북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이 문제였습니다. 북한에 두고 가면 탈북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고, 영영 헤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 모녀는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에 나와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갔지만 큰 딸은 이미 인신매매를 당해 어디론가 팔려간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그곳은 탈북 여성 인신매매 조직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큰딸을 찾으러 나왔던 김명희 씨는 기막히게도 두 딸마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도 김씨는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보다 “그렇게 팔려서라도 잡히지만 말아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팔려서라도 어디 가서 안전하게 잡히지만 않았으면, 그저 북한에 잡혀나가는 것만 겁이 나서 그걸 더 반대하지도 못하고 반대할 처지도 안됐고, 그렇게 됐는데 정작에 딸들하고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딸들만 보내고 저 혼자 남았을 때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8일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눈물만 흘렸다는 김명희 씨, 김씨는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지만 딸들을 찾지 않고서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었다”고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생존을 위해 많은 북한 여성들이 탈북을 했고 또 탈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중국에서 합법적인 신분을 가질 수 없고 강제북송 될 경우 박해를 받는 처지이기 때문에 인신매매범들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김명희 씨의 이야깁니다.

“중국에 넘어와가지고 우리 탈북 여성들이 중국 말을 모르지, 중국 변방대나 공안에서 계속 잡으려고 하지, 그 다음에 또 북한에서도 계속 잡아가잖아요. 그렇게 강제로 북송되고 하니까 우리거 거기서 인신매매를 당하고 아무를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어디가 하소연할 데가 없어요. 숨어다니는 처지니까 어디다가 누구한테 말할 수가 없고 우리를 법적으로 보호해 주는 곳이 없고 그러니까 인신매매를 당하면서도 어디다가 말 한마디 할 곳이 없는 거예요.”

김명희 씨는 자신의 딸들 외에도 많은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를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녀가 직접 목격한 사람만 해도 10여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김씨는 “그들은 정신적,신체적,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중국인들에게 팔려가고 있고 그곳에서의 삶은 ‘참혹’하다”고 전했습니다.

“정작에 거기 와서 살다보면 너무나도 현실이 참혹하고 신체적으로 불구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지체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그런 형편에 있는 사람들한테 시집와서 나름대로 어떻게 살아보자고 노력을 하지만 현실을 점점 알게 되면 안되잖아요. 그래가지고 계속 눈물 흘리고 어떤 사람은 타락하고 술 마시고 정말 그런 걸 많이 목격 했어요.”

딸들을 모두 잃었지만 김명희 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딸들도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며 목숨을 걸고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팔려가던 큰 딸은 이틀 동안 끌려가다 탈출해 자신을 팔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큰 딸은 자신을 팔았던 인신매매범에게 ‘어머니 있는 곳을 대주지 않으면 변방대에 자수를 해서라도 당신을 고발하겠다’며 강제북송을 감수한 채 어머니를 찾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김명희 씨는 큰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팔려간 두 딸도 기지를 발휘해 김명희 씨를 찾았습니다. 인신매매 조직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명희 씨는 두 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둘째와 막내 딸이 있는 마을로 김명희씨 모녀는 넘겨졌다고 합니다. 인신매매로 헤어졌다가 다시 인신매매를 당해 가족들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김명희 씨는 당시? 〈?그렇게나마 가족이 모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서로 헤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김명희씨 가족은 마침내 2003년 1월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김씨 모녀들은 서울에 둥지를 틀었고, 세 딸들은 나름대로 정착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명희 씨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남한테 드러내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은 많이 고려했댔고 딸들도 그렇게 했는데 저희 딸들 같은 경우에도 다 마지막에 엄마를 이해하고 말하는 게, 우리 탈북 여성들이 겪은 게 우리 식구만 겪은 게 아닌데 앞으로라도 또 다른 사람들한테 肩??불행이나 그러한 일이 더 닥치지 않게 하려면 정말 우리가 좀 그렇더라도 우리가 사람들한테 탈북 여성의 실상을 알리는 게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딸들도 다 승인을 해줬고요...”

김명희 씨는 “북한의 인권 문제 해결과 아직도 중국이나 3국에서 헤매는 탈북 여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증언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저희들의 미숙한 발언이나 또 불미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인권 상황이나 인신매매에 대한 문제가 조금이라도 우리 북한의 인권 상황에 도움이 되거나 또한 아직도 중국이나 3국에서 헤매는 탈북 여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가서 증언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보내드린 탈북자 통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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