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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미국의 독립, 선포 후에도 오랜 투쟁 거쳐 달성


13개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한 독립을 위해 그후로도 오랫동안 투쟁해야 했습니다. 전쟁중에는 식민지들이 연방 조항이라 불리우는 협정에 의해 뭉쳤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연방은 구속력이 약했습니다. 연방 조항은 중앙 정부를 구성해놓지 않았습니다. 이 협정은 사법 제도나 입법제도에 관한 규정도 없었습니다. 연방조항에는 정부 일을 수행할 행정부에 관한 내용도 없었습니다.

연방조항이 규정한 것은 회의 기구(Congress)를 창설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도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회의는 13개주에 자문을 제공하고 무슨 일을 하라고 요청하는 권한밖에 없었습니다. 각주에 해당되는 법을 만들수도 없었습니다. 이같은 제도가 허약하다는 것은 전쟁이 끝난후 즉시 분명해졌습니다.

영국의 챨스 콘왈리스 장군은 1781년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서 항복했습니다. 한 연락원이 이 소식을 의회에 전달했습니다. 의회는 아무 돈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가져온 연락원에게 줄 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의회에 참석한 대표들이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세사람은 느슨하게 각 식민지를 묶어놓은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창설하자고 촉구했습니다. 이들은 죠지 워싱턴, 알렉산더 해밀턴, 그리고 제임스 매디슨이었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혁명전쟁중 식민지 군대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연방조항이 자신의 군대에 아무런 힘을 보태주지 못했기때문에 그 법을 반대했습니다.

그의 병사들은 옷이나, 신발, 음식을 제공받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워싱턴의 군대는 의약품이나 담요도 없었습니다. 전쟁중 워싱턴은 군대의 사정에 대해 자주 분개한 서한을 썼습니다. 그는 한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든 우리 병사들은 벌거벗고 있다. 건강한 병사들도 벌거벗고 있다. 영국군에 포로가된 우리 병사들은 벌거벗고 있다.”

워싱턴 장군의 서한은 별다른 반응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식민지들은 워싱턴이 ‘이 전쟁은13개 식민지 모두의 전쟁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은 이들이 군인들이 필요로 하는것 보다는 자기 자신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더욱 악화됐습니다. 워싱턴은 연방 조항 아래서는 합중국이 아무런 희망을 가질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각 주 정부가 자기 주를 운영하듯이 모든 주를 운영할 중앙 정부가 없는한 우리는 하나의 국가로 존재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알렉산더 해밀턴도 동의했습니다. 젊은 변호사인 그는 전쟁중 워싱턴 장군의 부관으로 일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해밀턴은 중앙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13개주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었습니다. 그는 서한으로, 연설로, 그리고 신문 기고등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습니다.

세번째 중앙 정부 주창자인 제임스 매디슨은 사태를 정확히 내다보았습니다. 그 사태는 암울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아메리카에는 13개주가 있었습니다. 각주는 다른주를 희생시켜 자기 주의 이익을 챙기려했 습니다. 당시 9개주는 자체의 해군이 있었습니다. 각주는 자체의 육군이 있었습니다. 이들 주는 자기들의 주를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사용했습니다.

예를들어 버지니아주는 주에 세금을 내지 않는 선박은 나포할수 있다는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버지니아주가 말하는 선박은 영국이나 스페인의 선박이 아니라 다른 주의 선박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흔히 신생국의 정치적 문제는 그와같은 상업적인 문제에서 자라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1780년대 아메리카와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합중국이 무정부 상태로 치닷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같은 현상중 하나는 화폐제도였습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화폐가 없었습니다. 많은 아메리카인들은 화폐하면, 파운드와 쉴링등 영국 돈을 생각했습니다.

아메리칸 달라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의 가치가 어디에서나 동등하게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는 1달라가 8쉴링에 해당됐습니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는 32쉴링 이상의 가치를 발휘했습니다. 그같은 현상은 극심했습니다. 거기에다 프랑스의 크라운, 스페인의 더블룬즈, 유럽의 듀캇즈등 각종 동전이 화폐로 거래됐습니다.

1786년 메릴랜드와 버지니아 대표들은 포토맥 (Potomac) 강을 따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포토맥은 두 주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대표들은 새로운 주거지를 형성하는 일이 두 주만으로 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사업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어떤 대표가 인접한 델라웨어와 펜실바니아의 참여를 요청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또 어떤 대표는 미국의 전 주를 모두 초청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생국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다같이 논의할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견이 채택됐습니다. 회의 장소는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Annapolis)로 정해졌습니다.

회의는 예정대로 개막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대로 된 회의가 아니었습니다. 대표가 온 주는 5개밖에 안됐습니다. 4개주는 대표를 선정했지만 회의장에 오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4개 주는 대표를 선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나폴리스에 모인 대표들은 이 회의가 시작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이들은 더 큰 규모의 회의를 열 필요가 있다는데도 뜻을 같이했습니다. 이들은 뉴욕주의 알렉산더 해밀턴 대표에게 합의 내용을 문서로 만들도록 지명했습니다. 해밀턴은 각주의 의회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그는 내년, 즉, 1787년 5월에 필라델피아에서 회의를 열자고 말했습니다. 해밀턴은 이 회의의 목적은 합중국의 헌법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죠지 워싱턴이 없이는 그 회의가 성공할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죠지 워싱턴은 그 회의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류마치스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의 누이와 어머니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운트 버논(Mount Vernon)에 있는 농장도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공직에는 마음이 없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예상대로 그가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다면 그같이 다짐한 워싱턴은 어떻게 보일 것인가.

당시 아메리카에서 죠지 워싱턴은 가장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여러가지 질문이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만약 극소수의 주만이 대표를 보내면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회의가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어리석은 자로 보일 것인가?

가까운 두 친구, 제임스 매디슨과 에드먼드 랜돌프는 워싱턴에게 필라델피아로 가라고 권고했습니다. 워싱턴은 그들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워싱턴은 버지니아주 대표의 한사람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필라델피아 회의는 중요한 회의가 됐습니다. 죠지 워싱턴이 참석하기만 하면 그 회의는 중요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 회의에 맨 처음 도착한 사람은 제임스 매디슨이었습니다. 매디슨은 35세였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벌써부터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자신이 무슨말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정부 조직으로부터 당시까지 영어로 출판된 정부 관련 서적은 모두 읽었습니다.

매디슨은 미국이 강력한 중앙 정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13개 주 정부는 중앙 정부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매디슨은 그같은 구상을 너무 서둘러 추진하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힘이 센 중앙 정부 체제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 정부에 대해 신뢰를 가질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매디슨은 자기의 구상을 조용하게 추진했습니다. 그는 수백권의 책과 문서를 가지고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정부 체제에 관해 어떤 대표가 어떠한 질문을 하더라도 답변을 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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