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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리 초대 한국어 방송 주임 황성수 대담


미국의 소리 최초의 한국어 방송 편집 주임 황 성수 증언 - 1992년 12월 20일 (노시창)


노: 황 목사님께서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초창기 이곳에서 방송 요원으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때가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말씀해주시죠.

황:1942년 8월에 한국방송 시작할때부터 1946년 8월 미국을 떠나 한국 군정청에 나갈때까지 미국에서 방송을 했습니다.

노: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들이 미국에 오는 것은 어려웠을텐데요.

황: 전혀 불가능했죠.

노: 어떤 인연으로 오시게 됐습니까?

황: 1940년에 동경제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은사이신 박 형룡 박사님이 미국에 신학을 공부하러 가라, 그래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장학금을 얻어주어서 왔습니다.

1년후에 진주만 기습사건이 발생했어요. 미국 정부로서는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니까 일본말을 하고 일본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일본 사람은 믿을수가 없고, 미국 사람은 일본말을 모르고,,, 일본말 잘하면서 일본 사람에 대항할수 있는 건 한국 학생이다, 한국 사람은 독립 운동을 하니까. 그래서 자기들이 유학생을 조사를 쭉 했는데, 그중 제가 일본서는 공부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이다, 그래가지고 (군 정보 관리들이) 필라델피아에 찾아왔어요.

그들이 말하기를, 지금 미국이 일본하고 전쟁하는것 단순히 펄 하버 공격을 해서 방어전이라 그게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가 없어져야 일본에도 종교의 자유, 민주주의가 있을 것이고, 더구나 일본의 군국 주의가 넘어져야 한국에도 자유와 독립이 있는 거니까, 지금 미국을 돕는 것은 미국만 돕는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돕는 것이고 일본의 민주주의를 돕는 것이다,그러니 우리와 함께 일해달라는 거에요. 그래서 신학교 교수님들과 상의를 했더니, 신학교에야 언제든지 돌아올수 있지 않느냐, 전쟁은 할때 도와 주어야지, 가라, 그래서 워싱턴으로 올라와 채용이 됐습니다.

처음에는 군 정보국 여기 저기서 일을 하고, 세계를 향해서 단파 방송을 하는중에 특별히 태평양 지역으로 방송하는게 당시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어요. 그래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겨갔죠. 그래서 방송을 시작하는데, 현재는 미국의 소리에 일본 방송이 없습니다마는 그때는 일본하고 싸우니까, 일본 방송하고 한국 방송하고가 주가 됐습니다.

첫째는 일본 사람들이 전쟁 뉴스를 숨기니까, 미국이 점점 전진해들어가는 뉴스를 알리면서, 일본은 망할테니까 일찌감치 항복해라, 그런것과, 그담에는 일본의 군국주의자가 심하게 나가던 것을 지적해서, 나라 망할 짓을 했다, 그런것을 알리고, 그중에서도 또 일본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선구자들이 그러면 안된다고 했던 기록들을 찾아내느라고 참 여러가지 쏘스를 탔는데, 미국 정부의 힘이 크드라구요. 전 미국에 있는 도서를 모두 모아다가 주더군요. 그래서 뉴스, 뉴스 COMMENTARY, FEATURES등을 방송했는데, 한국 유학생들을 모으는 거죠. 제가 말씀을 드리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너무 훌륭한 일을 한 분들이 그때 방송했다는게 꼭 좋을른지 몰라서, 제가 성함을 말 안하겠지만, 한국에 있는 대 학자들, 그런 훌륭한 분들이 거의 다 와서 거기서 일을 했는데, 제가 일본서는 제일 공부를 많이 했다는 걸로 제가 주임을 했어요.(웃음) 그래서 그 분들이 번역한것이 제 검렬을 맡아야만 방송으로 나가요. 방송을 할때에도 제가 듣고 감독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 1942년 부터 대일 방송을 시작한겁니다. 일본말로 그런 방송을 하고, 또 한국말로는 한국 백성은 빨리 일어나 일본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독립 운동을 하라, 그렇게 호소하는 한국 방송이죠. 일본말, 한국 방송, 둘을 하는데, 제가 제일 높은 급수로서, 좋은 대우를 받고, 그렇게 일을 했습니다.

노:그때는 모두 몇분이서 일을 했습니까?

황: 일본말과 한국 방송 스태프는 달랐습니다. 한국 방송하는 사람은 많지않았어요. 많을때가 여섯분 정도고, 일본 방송은 25명 가량 있었어요.

노:방송 시간은 얼마나 됐습니까?

황: 꽤 됐어요. 일본 방송이 약 3시간 정도 나가고, 한국 방송이 한시간, 내지 두시간 정도가 나갔을 거에요. 뉴스는 10분 정도가 한 두번 나가고 뉴스 카멘터리가 15분짜리가 한 두개 나가고, 그담에 FEATURES 라고 이제, 설득하는 방송이죠. 그런것이 15분짜리가 나갔습니다.

노:들을수 있는 분들이 많지는 않았겠지만 들은 사람들은 대단히 충격적이었을 것 같은데요.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황: 전쟁중에는 거의 반응을 밖으로 낼수가 없었구요, 도리가 없지않습니까? 그리고, 물론 군의 비밀 담당자들은 다소는 알았겠죠. 반응이란 것이 극히 국한돼 있고, 전쟁이 끝난다음에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라도 들으려고 이썼다는 사람, 들었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나오드군요. 전쟁중에 전쟁의 진실한 뉴스를 알고자 해서, 일본 사람들이야 전부 숨겨놓고 하니까, 미국의 방송을 듣고 그것이 유일의 자기들의 정보의 쏘스였다, 그런 것을 한국의 지도자들이 이야기를 하더구만요.

노: 당시에는 직업도 직업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도 일조를 한다고 생각이 들었을텐데요, 당시 일하시던 분들의 열성이랄까, 근무처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황:말씀한대로요, 방송을 직업이라기보다 독립 운동이다, 그런 각오를 가지고 목숨 내놓고 한거죠. 또 가족이 본국에 있으니까, 들키면 가족이 사형당할른지도 모른다는 각오에 독립 운동이다 라는 각오를 가지고 하니까, 말만을 하는 것 같지만 그 하나 하나가 독립 운동이다 하고 했죠. 또 사실 저는 중경의 임시 정부에서 오라고 해서, 공보부 장관으로 임시 정부에 가려고 했었는데, 그때 브래드포드라고 제 주임, 나중에 John Field가 됐읍니다만, 그런분들이, 천명 군인은 쉽게 내보내서 중경 가 싸우게 할수 있지만, 네가 일본 정부를 향해서 하는 이 역할은 대신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네 하는 일은 너 자신이나 코리안 만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를 위한 공헌이다. 사실 유학생으로서 제가 아무 신분 보장이 없죠. 한참 저녁에 흥분하고 가노면 저녁에 잠이 안올 정도로, 손발이 떨리는 정도로, 그런 하나의 전투 정신을 가지고 했죠. 그렇지 않으면 못하죠.

노: 45년 해방이 될때에도 방송을 계속하셨는데 그때의 기분을 좀 말씀해 주시죠.

황:꿈에나 그리던 독립이 됐구나, 한국이 일본의 그 무지무지한 세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꿈도 못꾸었는데, 꿈만 같은, 시편 126편에 꿈만같은 큰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다, 하는 느낌을 가지고, 우리가 참, 감격을 가진거죠. 그런데 감격을 하면서도, 아쉬운건 있었어요. 예를 들면 드골 장군이 빠리 입성을 할때 뉴스를, 다른 사람보다 저는 이제 전시 정보국에 있으니까 바로 그 순간에 봤는데, 찢어진 불란서 기를 달고, 그 뒤에는 영국군, 그 다음에는 굉장한 최신 무기를 갖춘 미국군이 왔지마는, 불란서 기를 든 불란서 군대가 빠리의 개선문에 먼저 들어가니까, 불란서 사람이 주인이 됐다. 그런데 해방은 일본으로부터 되지마는, 한국 군대가 먼저 서울로 들어가야 우리의 한국이 될터인데, 외국 세력이 들어가서 이걸 나누어놓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해방된 즐거움도 있었지마는, 눈물이 나서 제가 그 뉴스를 보면서 마음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제가 울었죠. 그러니까 해방을 기뻐하면서도 분단국에 대한 아쉬움이 있은 거죠.

노:해방 이후, 귀국해서 어떻게 지내셨는지를 간단히 말씀해 주시죠.

황: 정부가 수립되는데 일을 해야 되니깐 오라고 해가지고, 국무총리인 이 범석씨하고 외무 장관인 장 택상씨가, 외무부 다섯국 중에 뭐든지 네가 원하는대로 택해라, 그래가지고 그때 제가 정보 국장을 했어요. 그래서 2년동안 일을 했고요, 50년에, 2년후에는 서울 용산구에서 입후보를 했는데, 당선이 됐어요. 그래서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8년했어요.

그다음에 자유당 말기에 불리한 바람이 불때에 한번 낙선했어요. 그래가지고 시골에 가서, 고향인 전남 보성에 가서 당선돼 올라왔죠. 그래서 세번 하고, 그 다음에 4.19 혁명이 나서, 4년 임기가 1년만에 끝나게 되니까, 참의원을 나갔는데, 그때에 전라남도에서 최고점으로 6년제 참의원이 됐는데 또 1년만에 5.16 군사 혁명이 나서 그 또한 그만두게 됐죠.

그래 또 정치하라고 그러지만, 아이고, 내가 두번이나 혁명겪은 자유당의 간부인데, 부의장도 지내고 한 사람인데, 나 이제 쉬겠다 했습니다. 뒤에서나 도와 드리죠 그랬죠. 그렇게 해서, 정계에서 물러나가지고, 변호사 하면서, 원래는 내가 교회일 할려고 하다가 전쟁중에 휩쓸려 가지고 나라일 한다고 했는데, 이제 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되겠다 해서 인제, 기독교 운동을 하면서도, 처음에는 평신도 운동을 하면서,,, 목회를 한것은 17년밖에 안돼요. 신학교 교수를 한건 40여년동안인데, 신학교와 일반 대학에서 교수를 했습니다. 교수가 본직이고 지금도 신학교 교수를 다섯군데서 하고 있어요.

노:오늘 바쁘신데 감사합니다.

녹음: 1992년 9월. 장소: 알링턴 소재 라마다 인. 방송일: 1992년 12월 20일 8:00 AM (EST) 당시 그의 나이 75세. 대담: 노 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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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수 약력

1917년 전남 보성에서 목사 아들로 출생

1937년 평양 숭실 전문 졸업후 동경제대 법문학부 대학원 입학

1940년 대학원 과정 수료후 미국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

1942년 미 국방부 전시 정보국에 발탁돼 일본어, 한국어 방송 주임으로 근무. 당시 한국어 방송부에는 신 사훈 박사, 김 태묵 박사, 전 순득 부부, 이 진목, 유 경상, 이 근성 (와세다 출신)등이 근무. 일어부에는 백계 러시아인 아나톨리 코파코프, 시로따(여)등이 근무

1946년 귀국후 한국 관계와 정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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