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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새 지도자 시진핑, 철저한 현장주의자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뒤를 이어 중국 최고지도자 자리를 승계하게 될 시진핑 현 국가부주석. (자료사진)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뒤를 이어 중국 최고지도자 자리를 승계하게 될 시진핑 현 국가부주석. (자료사진)
중국에서 시진핑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중국 13억 인구의 1인자로 떠오른 시진핑은 과연 누구인지, 최원기 기자가 보도합니다.

시진핑은 1953년 중국의 혁명 원로 시중쉰 전 부총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시중쉰은 공산당의 혁명 원로이자 광둥성의 개혁,개방을 이끈 인물입니다. 그러나 시진핑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문화혁명으로 숙청당하면서 자신은 시골로 쫓겨가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내야만했습니다. 한국의 중국 전문가 나영주 박사입니다.

[녹취: 나영주 박사] “시중쉰이라고 경제 부총리를 지냈죠.등소평과 개혁개방이후 활약을 했고, 문화혁명때 오랫동안 낙후된 지역에서 고생을 했죠”

그후 문화혁명이 끝나고 부친이 복권되자 시진핑은 1979년 명문대인 칭화대를 졸업하고 당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돼 당시 겅뱌오 부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합니다. 이후 당과 군, 지방을 오가며 행정가로서 본격 성장합니다. 이오 1987년엔 군 가무단의 유명가수 펑리위안과 결혼해 아내의 인기마저 등에 업었습니다.

시진핑은 1985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으로 옮겼으며 이후 17년간 푸젠성에서 일하면서 당서기를 지냈습니다. 이어 2002년 저장성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시진핑은 2007년 3월 돌연 상하이시 서기로 옮겼는데, 이는 당시 부패 문제로 낙마한 천량위의 뒤를 잇기 위해서였습니다.

상하이시 서기로 7개월 재직한 그는 마침내 2007년 10월 17차 공산당 대회에서 후진타오 주석이 미는 리커창을 밀어내고 차기 지도자로 떠오릅니다.

전문가들은 시진핑이 20년 이상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로 떠올랐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나영주박사입니다.

[녹취: 나영주 박사] “시진핑도 지방행정, 지방관료를 거치면서 지금의 당 총서기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있습니다.”

이어 2010년 10월 시진핑은 17기 당 중앙위원회 5차 전체회의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선출됐습니다. 이는 시진핑이 차기 지도자라는 것을 공식화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진핑은 철저한 현장주의자로 유명합니다. 저장성 서기 시절 1년의 3분의 1을 출장으로 보냈습니다. 또 저장성에서 근무하면서 이 지방의 국내총생산(GDP)을 1조5천억 위안을 생산해 거대 도시인 상하이를 능가하는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이와관련 미국의 중국 전문가가 리쳉 연구원은 “시진핑이 민간 사업을 발전시키는 인상적인 업적을 보여줬으며 이는 그가 개방적인 지도자임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시진핑은 또 화목을 강조하는 정치인입니다. 전문가들은 시진핑이 차기 지도자가 된 것은 그가 중국의 모든 정치 파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원만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중국의 5세대 지도자인 시진핑이 북한 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에 어떤 시각을 가졌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은 없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국어대학교 중국학부 강진석 교수는 시진핑이 기존의 대북 정책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은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북아에서 균형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 나영주 박사는 북한-중국간 인적 교류 고리가 약해졌다면 연결 통로를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습니다.

“김정은 지도부와 새로 구성될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과 인적 네트워크가 전혀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양국이 군사적 동맹이지만 인적 네트워크가…”

시진핑은 부주석 시절인 지난 2008년6월 첫 해외 순방국으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앞서 시진핑은 지난 1995년과 2005년에 한국을 방문했으며, 부주석 시절인 2009년 12월에는 서울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VOA뉴스 최원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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