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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6.25 참전용사 회고록 펴낸 재미 한인 강석희


60년 만에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오른쪽)과 함께 한 강석희 씨가 6.25 전쟁 당시 백선엽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제대증명서를 들고 있다.

60년 만에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오른쪽)과 함께 한 강석희 씨가 6.25 전쟁 당시 백선엽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제대증명서를 들고 있다.

이번에는 6.25전쟁 참전용사로 최근 미군과 한국 군 참전용사들의 회고록을 책으로 펴낸 강석희 씨와의 인터뷰를 보내 드립니다. 강석희 씨는 한국 군 제1사단 전차공격대대 수색대 소속 일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으며,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에 맞아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온몸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강석희 씨가 최근 펴낸 6.25전쟁 회고록은 `나라를 지킨 젊은 날의 회상'이란 제목으로, 미군과 한국 군 참전용사 23 명의 참전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백성원 기자가 강석희 씨를 인터뷰 했습니다.

기자) 6.25 전쟁을 함께 경험한 전우들의 이야기, 노병들의 기억을 담자, 이런 생각은 아마 평생 해 오셨을 것 같습니다.

강석희 씨) 그럼요. 노상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느끼는 게, 몸에 쇳덩어리가 붙어있으니까, 그게 욱신욱신 하니까 6.25하고는 떠날 수가 없죠.

기자) 몸에 쇳덩어리가 붙어있다는 말씀, 수류탄 파편을 뒤집어 쓰셨던 것과 관계가 있겠죠. 그 일화는 잠시 뒤에 여쭤보도록 하겠고요. 한국군 18명, 그리고 미군 5명, 이렇게 23명 참전용사들의 회상을 책으로 엮으셨는데요.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그 분들 말씀을 전부 듣고 정리하신 거죠?

강석희 씨) 한국 사람들은 다 만나서 받아 적어가지고 다듬은 것이고, 미국 사람은 두 사람은 만났고 세 사람은 자기네가 수기를 써 왔어요.

기자) 영어로 된 수기를 직접 번역도 하셨잖아요.

강석희 씨) 그렇죠.

기자) 책을 보니까요, 전투 지역하고 날짜, 뭐 작전명, 당시 자세한 전개 상황, 이런 게 상당히 상세히 소개돼 있어서, 20명이 넘는 노병들의 60년 전 기억을 되돌리는 것도 어려운데, 이걸 또 고증까지 하려면 상당히 힘이 많이 드셨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죠?

강석희 씨) 그렇죠. 제일 중요한 건, 대부분 이 사람들이 자기네 소속, 큰 전투, 그건 기억하고 있어요. 지역이나 전투명이라든가 그런 건 분명하지 않지만. 그래서 그 날짜와 지역, 그런 건 전쟁실록을 찾아서 고증을 해서 정확하게, 또 본인들한테 재확인하고 해서 정리했습니다.

기자) 전부 몇 년 동안 작업하셨습니까?

강석희 씨) 한 4년 걸렸어요.

기자) 강 선생님 참전기도 책에 실렸던데요. 제1사단 전차공격대대 수색대 강석희 일병, 이렇게 소개가 돼 있습니다. 몇 살 때 참전하신 건가요?

강석희 씨) 18살에요.

기자) 18살이요?

강석희 씨) 예. 그러니까 지금 여든 둘, 한국 나이로는 여든 셋이지.

기자) 네. 미군과 합동작전을 하셨다고 써 있던데, 그럼 미군들의 진중생활 역시 보셨을 텐데요.

강석희 씨) (웃음)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하고 같이 하는데 이게 판이하게 진중생활이 다르지. 우리는 먹는 게 주먹밥에다가 석박지라고 해가지고, 무가 익지도 않은 거에다가 그냥 고춧가루가 2개 정도 붙은 거 그거 먹고. 그 사람들은 그래도 가스 불에다가 물도 담그고, 또 베이컨이라든가 빵도 굽고 커피 끓이면 그냥 코가 간지럽지, 우리는. 그냥 침만 삼켰다고.

기자)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견디시느라고. 18살 나이에 전쟁터 한복판에 서게 된 강석희 일병에게 가장 힘들었던 전쟁의 기억은 뭐였을까요?

강석희 씨) 그건 추위와 배고픔. 물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그 공포심이라는 것도 맨 처음에는 뒤 따랐지만 나중에는 이제 그게 없어져요. 또 총알이라는 건 날아오는 게 보이지 않으니까. 결국은 운명에 맡기고 그야말로 작전을 하면서 하루라도 더 살고 무사하기를 서로 기원하고 그랬죠.

기자) 전쟁 공포 자체보다는 추위와 배고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능이 가장 크게 느껴졌군요.

강석희 씨) 예.

기자) 그리고 큰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당시 어떻게 그런 부상을 입으셨는지 상황을 간략히 소개해 주시죠.

강석희 씨) 우리가 고지를 확보해야 하니까 전투를 하면서 올라갔는데, 내가 맨 선봉에 서서 대공표지판이라는 걸 갔다가- 공중에서 비행기나 후방에서 포 사격할 때 식별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걸 둘러메고 올라갔는데 격전이 붙었어요. 거의 다 올라가서 적 진지 근처에서 백병전 단계까지 가서, 서로 수류탄이 오고 가고, 우리도 총으로 난사하고 돌격태세로 들어가려고 그러던 판에 결국 그 쪽 수류탄 하나가 번쩍하면서, 올라가는 중이었으니까 주로 상부를 맞았어요. 그러니까 반신, 위쪽으로 해서 오른쪽. 의식을 잃었죠. 그 전투에서 소대장을 비롯해서 수없이 죽었대요, 뒤에 알고 보니까. 결국 부상 당해서 어디까지 후송됐냐 하면, 서대문 형무소 자리가 그게 야전병원인데, 거기서 영등포 부교, 마포 쪽으로 해서 건너서, 방직공장, 그게 야전병원이에요. 그리 이송돼서 거기서 깨어났어요.

기자)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강석희 씨) 오른 쪽 팔목이 부러졌고, 그 다음에 수류탄은 얼굴서부터 오른 쪽 가슴 전체, 그래서 눈은 반은 실명됐어. 그러니까 아침에 깨어나면 벌써 성한 눈하고 반 실명된 눈이 교차되니까 소위 사팔(뜨기) 비슷하게 되지, 그러니까 아, 또 하루가 시작합니까? 그 상흔, 상처가 되살아나고 의식에서 떠나질 않아요.

기자) 네. 수류탄 파편도 수술로 일일이 빼낼 수도 없었고, 매일 아침 상흔을 느끼시는군요, 그러니까.

강석희 씨) 그렇죠. 매일.

기자) 미국에는 언제 오셨습니까?

강석희 씨) 1971년에 잠깐 왔다가 1973년부터 정착했어요.

기자) 미국에서 40년 넘게 사셨고, 더구나 뉴욕에서 ‘대한민국 뉴욕 6.25참전 유공자회’ 회장을 지내셨기 때문에 미군 전우 역시 많이 만나신 걸로 압니다.

강석희 씨) 그럼요.

기자) 서로간의 유대감이 상당히 클 것 같습니다.

강석희 씨) 그럼요. 그래서 10년 동안 뭐 실력은 부족하지만 어떻게든지 그분들, 뉴욕 근교에 사는 미군들 가족 초청해서 보은행사를 하고 그 분들에게 진 빚을 갚느라고 노력했죠.

기자) 60년 넘게 지나서 돌아보는 6.25 전쟁, 흔히 잊혀진 전쟁이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이게 왜 잊혀질 수 없는 건지, 그 전쟁이 또 한국, 미국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강석희 씨) 의미라는 건 결국 전쟁이라는 건 우리가 생각지도 않을 때 발생한다고요. 그러니까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전쟁의 위험성을 우리 후세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전후 세대들에겐 정말 꿈 같은 얘기죠. 뭐 저희도 그랬습니다만, 옛날에 역사 공부할 때 삼국시대 서로 전쟁하는 거, 이건 이유가 아닙니다. 한민족 한반도 산하에 전대미문의 참화를 줬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서 엄청난 비극이 닥칠 수도 있어요.

기자) 그렇게 중요한 전쟁에 참전하시고 또 기억까지 이렇게 책으로 남겨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강석희 씨) 네, 감사합니다.

아웃트로) 지금까지 6.25 참전용사인 재미한인 강석희 씨의 이야기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백성원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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