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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주년 특집] 한국전의 분수령, 인천상륙과 맥아더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중 배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중 배에서 전황을 살피고 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 5년 만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분 된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간 대리전의 성격을 띈 분쟁으로,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 축으로 하는 동서 간 냉전이 본격화 됐습니다. 미국은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해 3년 간 계속된 한국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고, 미국 외에도 전세계 15개국이 유엔의 깃발 아래 남한을 지원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9회에 걸쳐 한국전쟁을 되돌아 보는 특집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로 김근삼 기자가 한국전쟁의 일대 분수령이 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한국의 인천항. 서해를 바라보고 들어앉은 ‘자유공원’에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60년 전 한국전쟁에서 연합군의 가장 중요한 승리였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1950년 7월 중순. 북한은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전쟁 발발 한 달 여 만에 남한 영토의 90%를 점령했고, 연합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최후의 방어선을 쳤습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나도 방어선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또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북한 진영의 피해가 계속 늘어나면서, 인민군의 초조함도 커져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전쟁의 전황을 한 번에 바꿔놓은 것이 인천상륙작전입니다. 맥아더 사령관은 인천에서 미 육군과 해군, 해병대 등을 투입해 과감한 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13일 만에 서울까지 탈환합니다. 허리를 잘리고 보급선이 끊긴 인민군은 연패를 거듭하며 북-중 국경 주변까지 후퇴했습니다.

이런 인천상륙작전의 대승도 맥아더라는 한 사람의 고집이 없었다면,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맥아더 사령관은 한국전 초기에 이미 전세를 뒤집기 위한 상륙작전을 구상했고, 최종 목표로 인천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의 계획은 미군 내에서 조차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는 계획이 무모하다고 판단했고, 수정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미 해군 부참모장과 극동군 해군 총사령관을 지낸 알레이 버크 제독은, 당시 미군 지휘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전쟁 초기에 합동참모본부 지휘관들과 함께 일본의 극동 사령부를 방문했는데, 맥아더 사령관이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인천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군 지휘부에서는 비관적인 반응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본부가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지형적으로 상륙작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평소에는 수심이 낮기 때문에 상륙함을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3~4 시간 정도의 밀물 때만 겨우 상륙이 가능한 극히 제한적인 환경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려는 상륙작전에 적합한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극동군 사령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상륙작전에 필요한 훈련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미 태평양 해병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르무엘 셰퍼드 장군은, 합동참모본부가 맥아더 사령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합동참모본부는 인천이 아닌 군산을 검토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서울과 가까운 인천을 공격해야 한다고 꾸준히 설득했고, 결국 합동참모본부의 동의와 트루먼 대통령의 최종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맥아더 사령관은 상륙군의 부족한 경험을 보완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수의 해병대를 동원했습니다. 작전 일은 밀물 때가 가장 긴 9월15일로 잡았습니다. 이 날을 놓치면 11월 중순까지 기다려야 할 판이었습니다.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고, 해병대가 공격의 선봉에 섰습니다. 해병대 제5사단 3대대 소속이었는데, 이 중에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제대했다가, 상륙작전 때문에 긴급히 복귀한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해병대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에드윈 시몬스 장군은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물 때를 맞추느라 오전 7시쯤에 인천과 연결된 월미도 서편 해변에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해변은 물안개가 자욱했습니다.”

당시 월미도에는 인민군 4백 명이 있었는데, 상륙 며칠 전부터 퍼부은 포격으로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습니다. 연합군은 45분 만에 간단히 월미도를 점령했습니다.

저녁이 돼 다시 물이 불어나자, 인천 해변에 대한 본격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어둠이 깔린 물가에 총격과 연기까지 피어올라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분간하기 어려웠습니다. 연기가 많은 곳이 육지일거라는 생각에, 무조건 그쪽으로 전진했습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인천 지역에 주둔했던 인민군 병력 2천 명은 거의 전멸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점령을 눈 앞에 뒀던 인민군 주력부대도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퇴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연합군이 노획한 북한 측 문서를 보면, 전략 실패를 시인하고 있습니다.

“조선 인민군은 첫 성과들에 도취되어, 적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범했고, 그리하여 38도선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적은 개별적 지점들에서 38선을 넘어 진격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의 승리도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완전히 격퇴하고, 한반도를 통일시키겠다는 계획이 좌절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38선을 넘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의 참전을 우려했습니다. 자칫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기 어렵고, 개입한다고 해도 막강한 공군력으로 파괴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이런 예상은 빗나갔고, 중국의 개입으로 연합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후퇴합니다. 결국 맥아더 사령관은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교체됐고, 오명을 씻지 못한 채 50여 년의 긴 군 생활을 마감합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폭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의 짐 조벨 씨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최고의 성공과 최악의 실패를 모두 안겨준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인천상륙작전만을 놓고 본다면 맥아더 사령관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고, 가장 성공적인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맥아더 사령관에게 추락의 시작이었고, 결국 그의 명성을 거의 완전히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맥아더 사령관에 대한 평가는 미국에서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둔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는, 연합군의 절대적 열세였던 한국전의 전황을 일거에 바꿔놓은 역사적 순간으로 계속 기억될 것입니다.

미국의 소리, 김근삼 입니다.

아웃트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보내드리는 특집방송, 내일은 네 번째 순서로 전쟁 중 주요 인도주의 활동으로 기록된 `고아 후송작전’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청취자 여러분의 많은 애청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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