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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방 언론 주목받는 관리소 출생 탈북자 신동혁


북한 14호 개천관리소에서 태어나 자란 뒤 탈북한 신동혁 씨에 관한 책이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면서 북한의 정치범 관리소가 새삼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지난 해 말 신동혁 씨와 책 출간 계획, 관리소의 실체 등에 관해 대담을 나눴는데요, 신동혁 씨는 이 자리에서 워싱턴을 찾을 때마다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방문한다고 말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결코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워진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신동혁 씨가 왜 방문하는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인터뷰에 김영권 기자 입니다.

문) 네, 저희 VOA 방송국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워싱턴 포스트의 베테랑 기자죠? 블레인 하든기자를 통해서 본인의 얘기를, 또 개천 관리소의 실체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는데, 책 출간을 통해서 어떤 바람을 갖고 계십니까?

답) 글쎄요, 내 이름으로 내 스토리로 책 나오는게 문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 하루빨리 정치범 수용소라는게 알려져야 하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문제거든요? 저한테 있어서만은. 정치범 수용소라는게. 그 문제를 빨리, 해결은 안되더라도 많은 미국 사람들, 전 세계 사람들이 북한에 이런 수용소가 있다는 거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 이전에 사실 정치범 수용소에 관한 책이 영문으로 나온 것이 몇 개 있었는데, 그다지 큰 파급 효과는 없었다는 지적도 있는데, 어떻게 보세요?

답) 저도 그걸 안타깝게 생각을 하죠. 많은 사람들이 아직 관심을 갖지 못하고. 그런데, 확실한 거는60년 전에 독일의 홀로코스트 수용소 같은 그런 일들이 아직도 북한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만은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심각하게 믿진 않아도 완전히 없었던 일도 아니고, 60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 성격만 바뀌었을 뿐이지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 만은 말씀드리고 싶지요.

문) 여기, 마침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뮤지엄이 있지 않습니까? 박물관이? 거기에도 가보셨죠?

답) 네, 워싱턴 디씨 올 적 마다 가보곤 합니다.

문) 왜 올 적 마다 가보곤 하십니까?

답) 2008년에 처음 홀로코스트 가서. 그 전에는 몰랐었어요. 독일의 나치에 대해서. 그런데 그렇게 들어가서 독일의 수용소의 유물이라던지 기록물들, 영화를 보는데 그때 처음 생각이 나는게 북한도 이제 저렇게 되겠구나. 언젠가는. 그게 시간 문제일 뿐이지 비공개 적으로는 수용소에 20만 명이 산다고 그러는데 그사람들을, 북한은 그 사람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눈 깜짝할 사이에?

문) 그러니까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 수용소 안에 가보니까 수백 만의 유대인이 무참하게 살해되지 않았습니까? 북한에 있는 한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정치범 수용소 안의 사람들 역시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런 말씀이십니까?

답) 그렇죠. 오늘이라도 당장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죠. 북한에서는 그 사람들을 사람으로 안보잖아요.

문) 네, 그런데 사실 유대인 대학살도 집단 수용소 바로 지척에 사는 주민들 조차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북한에 있는 사람들 조차도 사실은 관리소 실체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답) 네, 많은 분들 만나서 얘기해 보면 자기네도 전혀 모른데요. 그냥 거기 잡혀가게 되면 늙어 죽을 때 까지 못나오는 정도만 알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는 모른데요. 제 얘기를 듣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 얘기를 들으면 깜짝깜짝 놀라죠. 같은 북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기 때문에 더 우리가 심각하게 봐야되는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 네, 납득이 안가시는 분들을 위해서 왜 북한 정권이 여차하면 다 몰살시킬 수 있다 라고 보시는지요?

답)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에서 북한에 대해서 인권문제를 꺼내면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든요? 그 심각하게 북한에서 받아들이는 만큼, 감추고 싶은게 많다는거 아니겠어요?

문) 구체적으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관리소와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본 무엇이 좀 흡사한가요?

답) 거의 대부분이,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영상을 보면서 그냥 북한에 내가 살던 수용소를 떠올렸었어요.

문) 그래서, 재현된 곳 같았다?

답) 네, 물론 피부색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고 해도 그 영상을 보는 순간에 저는 그냥 수용소의 모습이 떨올랐던 거죠. 모든 걸 다 떠나서. 똑같이. 뭐 하나 집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문) 아, 내가 살던 곳 그 자체였다.

답) 네, 그렇죠. 제가 가장 충격적이었던 거는 마지막에 연합군이 수용소 들어왔을 때 죽은 사람들 불도저로 밀어서 땅에다 파 묻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저는 그걸 보면서 우리 북한 사람들도 언젠가는 저 꼴이 된다고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게 시간 문제인 거죠.

문) 지난 3년 동안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수용소 실체에 대해서 알리시고, 연설도 하시고 하셨는데, 어떤 효과가 있으셨는지요?

답) 사실 이런걸 제가 오히려 여기서 하는 것 보다 한국에서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제 이름을 알리는게 문제가 아니라, 굉장히 나는 수용소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에서, 한국 사람들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제가 얘기하는 스토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아쉽게도 한국에서 이런 기회는 없었고요. 오히려 미국에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말도 모르는 백인들 앞에서 제가 이런 스토리를 많이 얘기했는데, 오히려 미국 사람들 한테는 아픈 마음으로 다가왔었고, 또 진심으로 북한에 대해서 도와준다고 생각을 했었고.

문) 네, 오히려 더 많이 공감을하는 느낌을 받았다?

답) 네, 오리혀 더 많이. 그래서 한국하고 미국하고 비교를 하면서 아쉽게 생각합니다.

문) 미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이렇게 말씀들 하시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또 결혼을 하셨나,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어떤 얘기인가요?

답) 2년 전에 저에 대해서 아시고, 미국의 백인 분들이 저를 아들로 받아들여 주셔가지고,

문) 양자처럼 해서요?

답) 네, 그래서 부모가 생긴거죠. 그냥.

문) 네, 생겨서 어떤 게 좋으신지요?

답) 글쎄요, 사실 전 가족이라는 개념을 잘 몰라요. 가족이라는 개념도 잘 모르고 부모에 대한 개념도 잘 모르는데, 일단 제가 한국이나 미국에 많이 다니면서 그런 걸 많이 배우려고 노력을 하면서 느끼는거 보면 부모라고 하는 경우에는 자식한테 먹을 것을 챙겨주고 추우면 옷을 입혀주고 그런게 부모구나 하는 걸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 내가 이렇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수준까진 아직 안올라왔기 때문에 지금 한참 배우는.

문) 그렇죠. 아무래도 관리소 안에서는 그런 체험을 못하시고 집단적으로 생활을 하시다가 오셨으니까. 가정이라는 개념이 사실 익숙하지 않으실 거 같은데, 그 때 한 행사 연설에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그런 가정의 따스함을 조금씩 배워가고 알아가고 있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요, 끝으로,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요?

답) 글쎄요. 뭐, 지금으로서는 지금, 개인적인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냥 내가 생각하고 있는 북한 인권이라던지, 뭐 정치범 수용소 없애기 운동이라던지 하는 것에 있어서는 가망이 없어요, 사실은. 제 개인적으로는. 일단은 희망을 가지고 살긴 하지만, 이건 그냥 내일이라도 당장 이 사람들 없애려면 없앨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저는 그냥 안타까움 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그냥.

문)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책도 쓰시고, 또, 계속.

답) 그렇게 하고는 있는데.
문) 약간 우울한 상황도 있다?

답) 그게 더 크죠. 책 써서 뭐 이런 것 보다는 오히려 그게 더 힘들어요. 책 쓴다는 것 자체가.

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니시고, 글을 쓰시고 하는게 수용소에 계신 분들이 언젠가는 기억해 주실 수 있으리라 그렇게 보는거죠.

답) 네, 그러면 감사하죠.

진행자) 최근 영문으로 출간돼 국제사회의 조명을 받고 있는 책 ‘14호 개천관리소에서의 탈출’ 주인공 신동혁 씨와의 인터뷰를 전해 드렸습니다. 인터뷰에 김영권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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