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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6.25전쟁 62주년] 인천상륙작전 2 – 허를 찌른 기습이 거둔 대승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휘함에서 전황을 살피는 맥아더 장군.

인천상륙작전 당시 지휘함에서 전황을 살피는 맥아더 장군.

6.25 전쟁 중 ‘크로마이트작전 (Chromite)’이란 이름으로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미군이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킨 탁월한 군사작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직관과 신념이 절대 무모한 일이란 비판을 샀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합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6.25 전쟁 62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특집방송을 보내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보도에 유미정 기자입니다.

인천 바다.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 이틀을 앞둔 한국 서해 앞바다는 전세계 7개국 소속 군함 수 백 척들로 까맣게 뒤덮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작전을 위해 미 육군과 해병대, 해군으로 구성된 제10군단을 창설하고 7만 4천 여 병력을 동원했습니다. 2만 5천t에 달하는 물자와 6천6백대의 차량, 2백 61척의 함선도 동원됐습니다.

한군전쟁 종군기자였던 미국 ‘뉴욕 헤럴드 트리뷴’ 신문의 극동지국장 마가렛 히긴스 씨는 회고록에서 당시의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전세계 외신 기자들이 팔미도 등대의 불빛을 따라 인천 앞바다에 포진한 유엔군 함대의 모습을 보고, 세기의 장관이었다고 타전했다.”

월미도. 맥아더 장군은 상륙작전의 첫 번째 목표로 인천항 입구에 있는 이 반달 꼬리 모양의 섬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새벽 밀물시간에 상륙해 월미도를 장악하고, 이어 월미도를 교두보로 저녁 밀물시간에 인천에 상륙한다는 전략입니다.

월미도 상륙 개시 전 48시간 동안 격렬한 함포 사격이 계속됐습니다. 미 순양함 톨레도호와 로체스터호, 영국 순양함 케냐호와 자마이카호의 포격으로 천지가 진동했습니다.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해군 항공기들도 폭격에 가세했습니다.

9월 15일 새벽. 마침내 붉게 물든 여명을 배경으로 월미도를 향한 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마운트 맥킨리호 함상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6시 33분. 1차 상륙 병력인 5연대와 3대대가 월미도의 녹색 해안으로 명명된 지점에 상륙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연합군의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이미 월미도에서 북한 군의 전력은 무력화됐다고 말합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폭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 기념관 제임스 조벨 씨의 말입니다.

[녹취: 제임스 조벨]

월미도 점령이 아주 쉽게 이뤄졌으며, 북한 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미군은 상륙 30분만에 월미도 섬의 정상을 차지하고 성조기를 내걸었습니다. 월미도 교전에서 북한 군은 사상자 3백 20명, 포로 1백36명이라는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밀물 때는 12시간 후. 제 10군단이 상륙을 기다리는 동안 콜세어 전폭기들은 인천 시가지에 융단폭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깔리면서 본격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밀물 때를 맞춰 인천의 적색 해안과 청색 해안에 연합군 상륙정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미군은 1시간 30분만에 적색 해안을 완전히 장악한 데 이어 청색 해안을 점령했고, 다음 날인 16일에는 인천 전 지역을 수복했습니다. 상륙작전 개시 24시간만에 인천은 연합군의 수중에 들어왔고, 연합군 전사자는 단 20명에 불과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적의 허를 찌르는 ‘기습의 효과 (element of surprise)’였다고 말합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재단 윌리엄 데이비스 사무총장의 말입니다.

[녹취: 윌리엄 데이비스 사무총장]

북한 군도 연합군이 상륙할 가능성이 있는 여러 지역을 검토했지만 인천은 지형과 조수 등 악조건 때문에 가능성이 가장 낮은 것으로 판단하고 방어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또 맥아더 장군이 성공률 5천 대 1로 여겨졌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것은 논리보다는 전략적 직관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말합니다. 미 해군전쟁대학의 한국전쟁 전문가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한국전쟁에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됐을 때 이미 70살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군 역사에 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과 세계대전 참전 등으로 풍부한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천을 장악한 연합군은 서울과 수원으로 진격합니다. 한반도 남쪽 낙동강 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총 반격이 시작됐습니다.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지면서 북한 군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패잔병들이 앞다퉈 투항했습니다. 연합군은 패주하는 북한 군을 추격해 서울과 38도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북진했습니다.

1950년, 9월 27일 오전. 서울 중앙청에 감격어린 태극기가 게양됐습니다. 유엔군은 6.25 전쟁 발발 90여일만에 서울을 공산 치하로부터 다시 되찾았습니다.

서울을 수복한 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북진합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참전 결과 38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의 분단이 고착됐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대담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켜, 꺼져가는 대한민국의 운명에 빛을 던져준 역사적인 대작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소리, 유미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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