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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6.25전쟁 62주년] 인천상륙작전 1 - 맥아더의 신념이 이뤄낸 성공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공적에 대해 설명하는 윌리엄 데이비스 맥아더 재단 사무총장(오른쪽).
6.25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공적에 대해 설명하는 윌리엄 데이비스 맥아더 재단 사무총장(오른쪽).

6.25 전쟁 중 ‘크로마이트작전 (Chromite)’이란 이름으로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은 미군이 불리한 전세를 극적으로 역전시킨 탁월한 군사작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당시 유엔군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전략적 직관과 신념이 절대 무모한 일이란 비판을 샀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지적합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6.25 전쟁 62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특집방송을 오늘부터 3차례에 걸쳐 보내 드립니다. 보도에 유미정 기자입니다.

인천 바다.

62년 전인 1950년 6월, 한국의 서해 바다. 수도 서울에서 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인천 쪽을 향해 한 노련한 미군 지휘관의 눈길이 고정됩니다.

인천의 찬물 때와 간물 때의 차이는 무려 10 미터. 전세계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지역의 하나인 이 곳에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이 빠지면 소라와 고동이 지천으로 널린 광활한 갯벌이 해안에 끝도 없이 펼쳐집니다.해안에 배가 닿을 수 있으려면 수심이 깊은 만조 때여야만 한다는 것을 노련한 노장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는 맥아더 장군의 마음은 분주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제 탱크 등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 군은 기습적인 남침을 통해 파죽지세로 진격을 이어갔습니다.

사흘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고, 개전 41일만에 부산과 진해 등 낙동강 이남을 빼놓은 남한 전역이 북한 군에 함락됐습니다. 마지막 남은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지 못한다면 신생 대한민국은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질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전문가들은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말합니다. 미 해군전쟁대학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A couple of days after the war began…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뒤 맥아더 장군은 서울 남쪽의 한 작은 공항으로 날아가 직접 전황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이 자리에서 한국 군이 북한 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남쪽으로의 전면방어 (Perimeter Defense)를 준비하면서 병력을 결집해 인천을 통한 총 반격을 구상했다고 치섬 박사는 말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폭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 기념관의 제임스 조벨 씨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2차 세계대전의 전략을 따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제임스 조벨] All of his operations by amphibious maneuver to bypass…

모든 상륙작전 병력을 적이 몰려있는 최전방을 피해 후방공격에 참가시키고 적의 병참선을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방어가 강화된 섬이나 진지는 우회하고, 일본군이 예상치 못한 곳을 공격해 적을 고립, 압박하는 이른바 ‘와도 전략 (Island Hopping)’을 성공적으로 전개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해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하고 동시에 미 제 24, 제25 사단이 남부전선에서 정면 반격을 가해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미 합동참모본부의 강한 의구심과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1950년 8월 일본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 열린 고위급 회의에서는 군 수뇌부 뿐아니라 맥아더 휘하의 일부 장군들까지 상륙작전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특히 매튜 리지웨이 육군 참모차장은 작전의 성공률은 5천 대1이라며 상륙이 용이한 군산 등 남쪽 지역을 제안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인천이 상륙작전에 최악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미 해군전쟁대학 도널드 치섬 박사의 말입니다.

[녹취: 도널드 치섬 박사] What you need at that time in 1950….

병력과 탱크, 트럭 등을 실은 상륙용주정 (LST)이 해안에 닿으려면 수심이 8 미터는 넘어야 하는데 인천의 경우 수심이 8 미터 이상 되는 날이 한달에 단 며칠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천은 또 상륙부대가 한꺼번에 상륙할 수도 없었습니다. 밀물이 들어와서 썰물이 되기까지의 가용시간은 겨우 3시간 뿐인데 먼저 상륙한 부대는 상륙 중 썰물이 되어 빠지면 12시간 동안 후방부대의 증원 없이 완전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비판가들은 또 인천이 높은 방파제로 보호되어 있는 점, 그리고 부산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상륙부대와 미 8군이 제대로 연계되기 어려운 점 등 수많은 문제점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6.25 Special 06/ 21 MJH (Act 10) BGM(Background Music)>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의 지형적 악조건이 미군과 연합군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재단의 사무총장 윌리엄 데이비스 예비역 해병 대령의 말입니다.

[녹취: 윌리엄 데이비스 사무총장] “The greatest advantage it had was the least likely…

인천의 가장 큰 장점은 그 곳이 상륙작전이 이뤄지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운 지역이란 것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허를 찌르는 예상치 못한 기습의 효과 (element of surprise)를 얻을 수 있었다고 데이비스 씨는 말했습니다.

후일 맥아더 장군은 회고록에서 인천상륙작전 결정 배경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더빙:맥아더 장군] “나는 적들이 인천 방어를 준비하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인천상륙의 모든 악조건은 놀라움의 요소가 되며, 적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야 말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도권을 빼앗아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맥아더 장군의 신념과 성공에 대한 확신은 워싱턴을 설득시켰고, 마침내 현대 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습니다.

‘크로마이트작전’으로 명명된 인천상륙작전의 공격 개시일은 9월 15일.

기함 마운트 맥킨리호에 몸을 실은 맥아더 장군은 검은 밤바다를 헤치며 2백 61척의 대전단을 이끌고 인천으로 진격했습니다.

미국의 소리, 유미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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