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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009년 북한 억류됐던 유나 리 4. “석방 후에도 행동 조심스러워”


3일 미국의 소리 방송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유나 리 기자 (왼쪽).

3일 미국의 소리 방송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유나 리 기자 (왼쪽).

지난 2009년 3월 두만강 부근 북-중 국경지대에서 탈북자 문제를 취재하던 2명의 미국 여기자가 북한 군에 붙잡혔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들은 142일간 북한에 억류돼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 받았으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풀려나 미국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요.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이 사건 발생 3주년을 맞아 한국계 미국 여기자 유나 리 씨로부터 당시 상황을 직접 들어보는 시간을 네 차례에 걸쳐 마련했습니다. 유나 리 씨와의 인터뷰는 지난 3일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 스튜디오에서 이뤄졌습니다. 백성원 기자가 유나 리 씨를 인터뷰했습니다.

문) 석방이 되고 미국 땅을 밟자마자 두 팔을 크게 벌려서 딸을 안고 우셨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 순간엔 남편보다 딸이 먼저구나. (웃음) 이런 생각도 제 맘대로 한 번 해 봤는데요. 물론 그렇진 않으셨겠죠, 당연히. (웃음) 부인의 석방을 위해서 누구보다 앞장섰던 남편, 많은 힘이 되셨을 것 같은데, 북한에 억류돼 있을 때나 혹은 풀려난 뒤에나, 어땠는지 말씀을 좀 해 주시죠.

답) 저희 남편은 진짜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인물이에요. (웃음)

문) 그 말을 기대하고 여쭸습니다. (웃음)

답) 제가 미안하죠, 진짜. 집에 와서도 사실 남편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는데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더 컸었어요. 엄마가 없이 그 어린 나이에 4개월 정도라는 시간이 큰 시간이잖아요, 아이한테. 그래서 그걸 보상해 주려고 아이한테 집중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다 주는 건 아니고 무서운 엄마에요. 그런데 사랑을 참 많이 줬어요. 예전에는 일 하느라고 아이가 오면 뒷전으로, 아이를 두 번째, 일 첫 번째, 남편 세 번째 했던 게 이제는 일이 세 번째로 돌아가고 여전히 남편은 두 번째. (웃음)

문) 예전에는 세 번째였던 게 맞군요. (웃음) 억류생활 전후에 자신의 생각이라든지 주변 사람들을 향한 감정, 그런 부분들이 굉장히 많이 변화된 것 같은 느낌이구요. 딸 이름이 ‘하나’가 맞죠?

답) 네.

문) 몇 살인가요?

답) 지금 미국 나이로 7살이죠.

문) 그럼 엄마가 억류됐을 때 4살, 당시에 엄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는 잘 몰랐다고 아까 말씀하셨죠?

답) 가족들은 숨겼는데 저희 어머니가 말씀하시더라구요. 아이가 뭔가 잘못된 걸 알고 있다고.

문)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7살이 됐는데, 7살의 어린 딸에게 그런 커다란 사건이 지금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답) 저랑은 직접적으로 아이가 얘길 안 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그런데 제가 책을 썼을 때 아이에게, 남편에게 한 권씩 글을 써서 줬어요. 네가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이걸 읽고 엄마를 이해했으면 좋겠다 라고 줬죠. 그런데 또 제가 강의다닐 때, 그럴 때 아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왜냐하면 학교다닐 때 친구들이 부모들한테서 얘길 듣고 너희 엄마 감옥에 있다 오지 않았냐 라고 아이한테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그 감옥이라는 단어가 아이들한테는 나쁜 사람, 죄인들이 가는 곳이잖아요. 그게 아이한테 상처가 될까봐 강의할 때 데리고 다녔었는데, 지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요. 엄마가, 결과는 어떻게 힘들게 됐지만 과정은, 동기는 좋은 일을 하려다가 이렇게 된 거다. 멀리 떨어져 있게 됐고, 우리 가족이 힘든 상황을 겪은 거다 라고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저한테는 얘기 안 하는데 친구한테 얘기하는 걸 친구 엄마가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문) 예. 지금 7살이니까 나이가 들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겠죠. 더군다나 가족들이 그 때를 회상하면서 지금 유나 리씨처럼 그래도 웃을 수 있는 상황이 되서 참 다행이구요. 유나 리 하면 이제 꼬리표처럼 절대 뗄 수 없는 이름이 있습니다. 함께 억류됐던 로라 링 기자인데요. 지금도 연락을 가끔 하고 지내시겠죠, 물론?

답) 자주 생각하고 자주는 연락을 못합니다. 로라도 이제 아이가 있어서 바쁘고 또 일을 하거든요. 그리고 저도 학교에 돌아와서 풀타임으로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자주 연락은 못하지만 서로 문자를 주고 받거나 무슨 일이 있었을 때, 또 이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돌아가셨을 때 서로 전화했었죠.

문) 예. 1백40일이라는 숫자로 이 기간을 표시하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경험이었는데 이제 3년이 지나고 그동안 사건에 대한 주변의 여러가지 평가를 많이 접하셨을 겁니다. 용기있는 여성으로 상도 받으셨고, 또 여러가지 고무적인 찬사가 있었던 반면에 처음부터 너무 무모한 일에 도전한 것 아니냐, 그래서 탈북자들의 상황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런 비판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또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굳이 나서서 대응을 일일이 하지도 않으셨었구요. 이 자리를 빌어서 유나 리씨의 뭐라고 할까요, 혼자 삭이고 가려고 했던 그런 부분을, 다는 아니더라도 좀 가슴을 열어서 말씀해 주실 순 없을까요?

답) 너무 무모했던 것이 아니냐, 이거는 돌아오자마자 이런 질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큐멘타리라는 것이 어떤 장면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제가 글을 쓰는 기자였다면 멀리 앉아서 바라보면서 글을 썼겠죠. 그렇지만 저는 다큐멘타리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가장 가까이 가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제가 그 상황에 있을 때, 현장에 있을 때는 카메라 안에 보이는, 뷰파인더에서 보이는 그 상황만이 사실이 되고 그 밖의 상황들은 사실 밖의 상황들이 되는 것 같아요. 잘 이해가 되실지 모르겠는데.

문) 본인이 하고 있는 작업에 매몰될 수 밖에 없는 그런 환경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답) 너무 집중을 해서 포텐셜 데인저 한 것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을) 잠시 잊었었어요. 탈북자 상황을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얘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희가 위태롭게 만들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희 상황으로 인해서 북한 정부가 탈북자들이 탈출하는 상황에 더 집중하고 감시가 더 강해졌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탈북자들의 상황이나 그 분들을 지하에서 도와주셨던 분들의 상황이 한 번도 쉬운 적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이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길을 트셔서 탈북자들을 도와주셨고 탈북자들이 자유를 찾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조용히 있는 것도 제가 나서는 게 그 탈북자를 도와주는 건지 아니면 제가 조용히 있는 것이 탈북자들을 도와주는 건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탈북자들은, 또 탈북자 단체에서는 왜 조용히 있느냐, 집에 왔으면 더 나서서 우리 상황을 도와줘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제 경험으로 제가 다큐멘타리를 만드면서 그 분들을 도와주려는 동기로 했던 것이 그 분들을 더 힘들게, 힘든 상황에 빠뜨렸다는 질타를 받았었기 때문에 더 제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꼭 나서서만 그 분들을 도와줄 수 있느냐, 방송에서 떠들어서 도와줄 수 있느냐, 아니지 않습니까, 지하조직을 꾸려서 탈북자 탈출을 돕는 분들이 얼굴이 알려진 분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저는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 이름하고 얼굴이 알려졌기 때문에 제 행동에 더 책임감이 느껴지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이제 더 나서서 특히 인권 등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여달라는 요구, 기대, 이런 것들이 혹시 또다시 어쩌면 본인이 나서서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지, 이런 우려가 있으신 걸로 짐작이 되구요.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또 쓰신 책 말미에 보면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여전히 탈북자들을 돕고 싶지만 본인이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될 때가지 기다릴 것이라고 쓰셨거든요. 그 기회, 물론 지금 구체적으로 떠올리기는 힘들겠지만, 그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기회를 ‘그 문이 열릴 때까지’ 이렇게 표현하신 걸로 제가 봤습니다만.

답) 누군가에게서 떠밀려서 사람들 앞에 나가서 탈북자들을 위해서 소리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열려서 제 마음의 두려움이 없어졌을 때 그 때 그 분들을 진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제가 하는 일이 제가 그 분들을 위해 소리쳤을 때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도 판단이 안되는 상황에서 떠밀려서 일을 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었어요.

문) 예. 지금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신 게 맞죠?

답) 네.

문) 최근 근황을 좀 소개해 주십시오.

답) 지금 컬럼비아 대학에서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구요. 다큐멘타리 프로그램에 들어가서 졸업작품으로 다큐멘타리 한 편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 방송.취재와 관련된 일을 앞으로도 계속 하실 계획인 걸로 들리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했던 것도 사실은 방송.취재와 관련된 거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일에 더 집중하시는 이유, 단순히 방송에 대한 보람으로 표현하기엔 좀 부족할 것 같은데 그 동력이 뭘지도 궁금하네요.

답)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웃음) 왜 그렇게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보면 화가 나고, 제가 갖고 있는 기술이나 제가 갖고 있는 능력으로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줘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매일 의무감을 갖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상황을 볼 때마나 화가나요. 그래서 알려주고 싶어요. 세상에 중요한 이야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들에 대해서 아마도 제가 힘이 될 때까지 그 일을 하면서 살 것 같습니다.

문) 예. 그런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잘 들려주실 분이 또 유나 리씨 일 거라고 믿구요. 3년 전의 억류사건, 그 일로 인한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오늘 이렇게 저희 스튜디오까지 직접 나오셔서 최대한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답) 네, 고맙습니다.

4편을 마지막으로 유나 리 기자와의 인터뷰 시리즈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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