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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보도 2] 막 내린 김정일 시대 - 북한의 핵•안보 전략


노동당 창건 기념일 행진을 하는 북한군 (자료사진)

노동당 창건 기념일 행진을 하는 북한군 (자료사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함께 그의 17년 철권통치도 막을 내렸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막 내린 김정일 시대를 분야별로 조명해 보는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백성원 기자가 김 위원장이 추진했던 핵과 안보 전략을 전해 드립니다.

(북한중앙TV) “주체 혁명 위업의 계승 완성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쳐오셨으며 사회주의 조국의 강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나라의 통일과 세계의 자주화를 위하여 불철주야 정력적으로 활동하시던…”

지난 19일 `북한중앙 TV’는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김 위원장이 북한을 “핵 보유국, 무적의 군사강국으로 만들었다”고 찬양했습니다.

실제로 1994년 7월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린 뒤 핵 개발은 북한의 대표적인 군사정책이자 대외정책의 근간이 됐습니다. 그리고 핵 보유국 지위야말로 북한 핵 전략의 기본방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어려운 내외적 여건 속에서도 일방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했습니다. 한반도에 이른바 1차 북 핵 위기를 조성한 겁니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는 북한의 핵 포기를 대가로 경수로를 지어주는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지만, 김정일은 약속을 어기고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국 외교부 북미과장이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사무차장으로 북 핵 문제 해결에 깊이 관여한 김영목 현 뉴욕총영사의 설명입니다.

“북한이 약속을 어기고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제네바 합의가 깨지게 되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제네바 합의를 굉장히 성의있게 여러 나라들이 서포트하고 아주 힘들게 가져갔는데 다 깨뜨린 주범은 역시 북한입니다.”

이후 북한 핵 문제는 협상 국면에서 벗어나고, 뒤이어 2002년 10월에는 북한의 비밀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이 드러나면서 제2차 북 핵 위기가 촉발됐습니다.

당시 북한을 방문했던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 당국에 핵무기 계획을 중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습니다.

“I told the North they must immediately and visibly dismantle this covert nuclear weapons program.”

하지만 김정일 위원장은 생존권을 위해 핵을 포기할 수 없다며 핵 개발 의지를 분명히 천명합니다. 핵무기를 가질 의사가 없다는 이른바 김일성 주석의 유훈과 상반된 의사표시를 한 겁니다.

이 같은 의지를 증명하듯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지하 핵실험장에서 1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북한중앙TV) “우리 과학 연구 부문에서는 주체 95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이어 3년 뒤인 2009년 5월 25일 1차 때보다 규모가 5배나 큰 2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며 김정일 위원장은 핵보유국을 기정사실화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집권하기 1년 전 노동 1호 발사로 시작된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도 김 위원장 시대에 들어 가속화 됐습니다.

1998년 8월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장거리 탄도미사일인 대포동 1호를 시험발사한 데 이어 2003년 4차례의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 그리고 2005년 KN-02 단거리 지대공 미사일을 쏘아올렸습니다. 그리고 2006년에는 대포동 2호 시험발사를 단행하는 등 김정일 위원장 시대 내내 중.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북한은 특히 2009년 4월 발사한 시험통신위성 광명성 2호가 궤도에 정상적으로 진입했으며 위성관측과 관제시험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중앙TV) “광명성 2호는 40.6도의 궤도경사각으로 지구로부터 제일 가까운 거리 4백90km, 제일 먼 거리 1천4백26km인…”

핵과 미사일 개발 뿐아니라 김정일 위원장이 1994년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엔 한국에 대한 직접 도발이 더 많아졌습니다.

1996년 강릉에 잠수함과 무장공비 25명을 침투시켰고, 1999년에는 북한 군함들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한국 해군 고속정에 포격을 가했으나 패퇴했습니다. 제 1차 연평해전이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2002년 6월 29일 다시 남측 함정들을 향해 기습 포격을 감행했습니다.

지난 해 3월에는 한국 초계함 천암함에 어뢰를 발사해 한국 해군 장병 40여명을 사망케 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한국 민간인 2명이 사망했습니다. 연평도 포격은 6.25 전쟁 이후 북한 군이 한국의 민간지역에 가한 첫 무장 공격이었습니다.

이 같은 군사적 위협 뒤에는 김정일 위원장 통치 기간 내내 북한이 내세웠던 선군정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체제안정을 위해 국가보위와 국방을 최우선 국가목표로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군부의 영향력 강화는 대외정책에서도 강경노선을 취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공했습니다. 대량살상무기를 이용한 공격과 이에 따른 공멸의 위협을 미국과 한국 일본에 대한 협상카드로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6자회담에서 핵 불능화 가드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노리는 방법을 끊임없이 사용한 근거가 됐습니다.

따라서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물려받은 ‘핵카드’를 북한의 새 지도부가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향후 한반도 상황에 핵심 지표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해 드리는 특별기획, 내일은 세 번째 순서로 김정일 시대의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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