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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터뷰] 동구권의 강성대국 경험 – 2. 루마니아 스칼라튜 사무총장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

저희 `미국의 소리’방송은 북한이 주장하는 2012년 강성대국의 해를 맞아 과거 동구권의 강성대국 운동 경험을 동구권 출신의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들어보는 기획인터뷰를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순서로 루마니아 편인데요, 미국의 인권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의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입니다. 김연호 기자가 스칼라튜 사무총장을 인터뷰했습니다.

문) 루마니아 역사에서 북한의 강성대국 운동과 비슷한 사례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답) 루마니아의 경우는 70년대 차우셰스쿠 정권이 2000년을 목표년도로 정하고 이른바 ‘다양하게 발달된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약속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2000년을 고대하는 선전가요를 부른 기억이 납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은 2000년이 되면 루마니아가 이렇게 바뀔 것이다, 이런 선전을 항상 했습니다. 차우셰스쿠의 연설에도 자주 등장했는데요, 차우셰스쿠에게 2000년은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는 해였습니다.

문) 차우셰스쿠 정권이 구체적으로 어떤 공약을 했나요?

답) 인구를 크게 늘려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게 대표적인 공약이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인구를 2000년까지 3천만 명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하고 낙태를 금지했습니다. 60년대 중반 루마니아 인구가 2천만 명을 밑돌았고 89년 차우셰스쿠 정권이 무너졌을 때도 2천3백만 명밖에 안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아주 야심찬 계획이었죠. 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여성들은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불법으로라도 낙태를 했는데요, 불법 낙태시술을 받다 숨진 여성이 5천 명이나 됐습니다. 물론 당국에 적발된 의사들은 감옥에 갔죠. 경제적으로는 연필에서 비행기까지 모두 국내생산이 가능한 체제를 만들겠다는 게 차우셰스쿠의 목표였습니다.

문) 차우셰스쿠 정권이 그런 약속을 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답) 80년대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등장해 개혁개방을 표방할 때까지만 해도 차우셰스쿠는 정권의 정통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차우셰스쿠가 신경썼던 건 정권의 정통성 보다는 어떤 정치적 유산을 남길 것인가였습니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역사에서 외세를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왕과 장군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하게 하면서 개인숭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2000년은 새천년이 시작되는 해였기 때문에 차우셰스쿠가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차우셰스쿠가 개인숭배에 집착했던 데는 71년 북한 방문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성 우상숭배와 주체사상에 큰 영향을 받은 거죠.

문)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 루마니아의 생활수준은 어땠습니까?

답) 60년대와 70년대 전반까지는 살기 좋았습니다. 차우셰스쿠는 60년대 중반 소련의 간섭을 배격하고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서방세계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당시만 해도 식량문제는 전혀 없었습니다. 국가에서 배정한 아파트의 크기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80년대 들어서 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차우셰스쿠가 외국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농산물과 공산품을 대량으로 수출하도록 하고 수입은 규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식량난이 심해졌는데요, 배급소 앞에서 온 가족이 몇시간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국경지역에서는 외국 물건이 밀거래됐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접경지대에 장마당이 많이 있었는데, 비디오나 화장품, 술, 담배, 청바지, 커피, 이런 서방세계 물건들이 거래됐습니다.

문) 차우셰스쿠 정권도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산업을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요?

답) 무리한 산업화 정책 때문에 루마니아 국민들의 사기가 오히려 떨어지고 경제가 엉망이 됐습니다. 루마니아는 전통적으로 농업이 발달해서 유럽의 곡창지대로 불렸습니다. 하지만 차우셰스쿠 정권 아래에서 농장은 국유화됐고 생산성은 크게 떨어졌습니다. 5개년 계획이 계속 나왔지만 실제로 목표가 달성된 게 아니라, 협동농장에서 생산량을 거짓으로 보고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완벽한 사회였지만 실제로는 식량난에 허덕였던 거죠. 그리고 산업화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농촌사람들을 강제로 산업도시에 재정착시키는 바람에 농촌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했습니다. 수확기가 되면 군인과 학생이 동원됐는데요, 저도 중고등학교 때 매년 3주에서 6주 정도 농장에 가서 일했었습니다.

문) 차우셰스쿠 정권이 수출에 매진했던 만큼 수출산업은 사정이 다르지 않았을까요?

답) 수출용으로 만든 물건들은 국내 소비용보다 품질이 낫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다들 일을 하는 척만 하고 품질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해외 수입업자가 루마니아제 자동차의 품질을 시험해 봤는데, 같은 종류의 자동차인데도 문짝을 떼어서 다른 차에 달아보면 잘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 2000년에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약속에 루마니아 국민들이 희망을 걸지는 않았습니까?

답) 전혀 희망을 걸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걸 단계는 이미 지났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차우셰스쿠의 공약을 냉소적으로 바라봤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든 날이었기 때문에 2000년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차우셰스쿠 자신도 현실을 전혀 직시하지 않았습니다. 89년 12월 온 나라가 이미 안에서 무너지고 있을 때도 차우셰스쿠는 임금을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89년에 들어서 루마니아가 해외에 진 빚을 모두 갚았는데, 만약 그 때 차우셰스쿠가 식량과 생필품 수입을 단행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문) 이런 결과에 대해서 차우셰스쿠가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였습니까?

답) 절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대단한 업적을 쌓았고, 그 때문에 더 대단한 업적을 남겨야 하는 사명이 다시 생겼다고만 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산주의야말로 인류가 만들어낸 제도 중에 가장 뛰어난 제도라고 믿었습니다. 루마니아 공산정권이 무너지기 전에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개혁 개방을 표방했을 때였죠. 하지만 차우셰스쿠는 개혁개방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60년대말과 70년대초 소련의 간섭을 배격했을 때 이미 개혁개방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이용한 겁니다.

문) 그런 차우셰스쿠의 모습을 보고 루마니아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답) 아주 냉소적으로 반응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강력한 독재체제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설마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서 일어난 변화가 루마니아에도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죠. 89년 체코슬로바키와 헝거리, 폴란드, 불가리아에서 공산정권이 무너져 갔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루마니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차우셰스쿠 정권도 무너졌습니다.

진행자) 과거 동구권의 강성대국 운동 경험을 동구권 출신의 전문가들로부터 직접 들어보는 기획특집, 내일은 동독편이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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