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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없다


정치, 경제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강연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것. 조지타운 캠퍼스에 적을 두고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곳 워싱턴이 아니면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전문가들의 강연들이 하루에도 몇 개씩이나 쏟아지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마음만 앞섰지 모두 참석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매번 수첩에 열심히 적어놓고는 지나치기 일쑤라지요.

개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특강과 제가 2년 전 국제정치에 처음 관심을 가지면서 읽었던 "Surprise, Security, and the American Experience"의 저자인 예일 대학교 John Lewis Gaddis 교수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강연이 사전예약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몰랐던 저는 RSVP를 하지 않아서 두 분의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나 안타깝고 속상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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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연찮게 듣게 된 특강과 이후의 아쉬웠던 마음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Made in Italy: The Global Market and the Luxury Goods Industry"라는 제목의 강연이 오후 2시에 있었습니다. 연사는 이탈리아 패션명품산업을 대표하는 두 명의 CEO. 구찌의 전 회장과 제냐의 CEO 였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는 강연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이미 안으로는 들어갈 수조차 없었고, 멀리서나마 강연을 들으려는 학생들로 복도까지 붐비던 상황이더군요. 운 좋게 두 분의 CEO 바로 앞자리에 앉게 된 저는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강연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강연내용은 이탈리아 명품산업의 현주소와 발전전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샹제리제 거리에서는 1초마다 하나씩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가 팔려나간다는 것을 예로 들며 미국, 유럽, 일본 그리고 중국시장이 주를 이루는 양사의 글로벌 시장에 대한 현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입니다.

각각 20분 남짓 이어진 두 CEO의 강연에서 ‘Japan’과 ‘China’라는 단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등장한 반면, 그렇게나 고대했건만 'Korea'는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왜 한국은 한 번도 말하지 않는 거야? 여러분 삼성 몰라요? 우리가 그 삼성을 만들어낸 ’Korea‘ 라구요!’ 속으로 열두 번도 더 이렇게 외치며, 삼성과 구찌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코리아’를 몰라주는 ‘구찌의 회장님’에게 그저 내세울 말이라곤 ‘삼성’ 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강연 후 함께 참석한 한국인 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너 잘 모르는구나,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대부분의 판매실적 리스트에 한국은 아예 오르지도 않아. 그런 반면 일본에 대한 대접은 완전히 다르지. 루이비통 체리가방 알지? 그건 원래 일본시장을 타깃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생각지 못하게 전 세계에 히트한 제품이지. 본사에서 회의가 소집되면 일본 애들은 영어 못해도 상관없어. 통역까지 알아서 다 붙여주거든. 대부분의 명품브랜드는 일본하고 중국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 정도로 두 나라가 가지는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해.”

“너무 속상해, 속상해”를 연발했지만, 결국 세계 시장에서 한국이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값어치는 그것뿐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잔뜩 풀이 죽어 기숙사로 돌아와 룸메이트에게 이런 얘기를 늘어놓았더니 훨씬 더 적나라하게 한국의 위치를 말해주더군요. “그레이스, 그건 사실 맞는 말이야. 아시아에서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의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아직까지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 정도에 머물러 있어. 중국이나 일본만큼 서구 사람들에게 친숙한 나라는 아니라고 봐.”

국내에서는 ‘동북아의 허브’를 주창하지만 세계시장에서 ‘코리아’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라곤 그저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 전 세계인들이 모두 좋아 할 것이라 생각했던 ‘김치’ 조차도 중국, 타이완, 일본 등 아시아 사람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서구인들에게 생소한 음식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태평양을 건너온 지 한 달 만에 깨달은 한 가지가 있다면, 세계 속의 대한민국의 위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 희망적인 미래를 이야기하는 건 모두에게나 힘이 되는 일이긴 하지만, ‘한국’이라는 브랜드가 얼마만큼의 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적나라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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