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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정치생활의 막을 내리고 양위를 선언한 '캄보디아 시아누크 국왕' - 2004-10-12


캄보디아 국회는 최근에 양위를 선언한 올해 81세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문제를 9인위원회에 위임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캄보디아법에 따라 9인위원회는 오는 14일까지 새로운 국왕을 지명하던가 아니면 왕정을 폐지하던가 양단간 결정을 해야 합니다.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1941년에 프랑스 식민지 총독부가 그를 캄보디아 국왕으로 선임했을 때, 겨우 열 아홉 살이었습니다. 시아누크 국왕은 정치 초보자였지만 단순히 의전적이던 캄보디아 국왕의 자리를 아주 강력하고도 국민들의 인망을 받는 지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시아누크 국왕은 캄보디아가 1953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직후한때 아버지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주석직을 선택했습니다. 시아누크 주석은 그후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별다른 반대 없이 캄보디아를 통치했습니다.

미국의 캄보디아문제 전문가인 데이빗 챈들러 씨는 시아누크 국왕은 부지런하고 애국적인 군주였지만, 그는 또한 독재자였다고 말합니다.

챈들러 씨는 시아누크 국왕은 확실히 독재자였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아주 인기있는 독재자였으며 반대자들은 단결하지 못했고 정당은 와해됐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아누크 국왕은 다른 군주들이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의 국민들에게 다가감으로써 캄보디아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시아누크 국왕은 때때로 영화제작이나 음악, 출판 같은 사치스러운 개인적 예술 취미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시아누크 국왕의 통치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휩쓸던 공산주의 물결이 마침내 캄보디아에까지 미치고 베트남 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침입한 1970년에 돌연 종식됐습니다.

인도차이나 문제 전문가인 호주 국방대학의 칼 타이어 씨는 시아누크 국왕이 베트남 전쟁 때 공산주의와 민주진영 사이에서 캄보디아의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고 지적합니다.

시아누크 국왕은 처음에, 당시 동남아시아 주류의 중립 움직임 속에서 잘 순응해 나갔지만 냉전체제가 조성되자 적응력을 상실했고 결국 소련과 중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지원 중단을 간청하느라 두 나라를 순방하는 동안 전복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시아누크 국왕은 그후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복귀를 꾀하는 나머지 과격한 공산주의 단체인 크메르 루주와 제휴했습니다. 역사가들은 그것이 시아누크의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말합니다.

1975년에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를 장악하자 시아누크 국왕은 프놈펜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러나 크메르 루주 정권의 대학살로 1백 여만명의 캄보디아 국민과 자신의 아들 열 네명 가운데 5명이 희생되는 동안 시아누크는 가택에 연금돼 있었습니다.

1979년에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 정권을 축출하자 시아누크는 또 다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시아누크 국왕은 베트남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크메르 루주와 제휴하고 별도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1991년 유엔을 통한 캄보디아 평화협정이 이루어진 후 시아누크 국왕은 프놈펜으로 돌아갔고 1993년에 왕권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시아누크 국왕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시들해지고,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매번 퇴위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고령의 시아누크 국왕은 이번에 양위를 선언할 때까지 신병 치료를 위해 중국에서 장기 체류하고 있었습니다.

시아누크 국왕의 후임 국왕으로 그의 둘째 아들, 시아모니 왕자가 유력시되는 가운데 훈 센 캄보디아 총리는 시아모니 왕자를 후임 국왕후보로 지명해 놓고 있습니다. 시아모니 왕자는 최근까지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UNESCO주재 캄보디아 대사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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