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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체결 50주년 특집] 휴전협정 이후 남-북한의 변모상 - 2003-07-26


한국 전쟁이 가져온 남북한 간의 적대감은 형식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50년전인 바로 이 달에 휴전협정이 이뤄지면서 종식 됐습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남북한은 기간 산업등 하부구조가 거의 파괴 되는 등 한반도의 파괴상은 실로 컸었습니다. 그러하던 남북한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 된이후 제각기 변모를 거듭해 왔습 니다. 휴전협정 이후 한반도의 변모상을 살펴보는 배경 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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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팝송 가수인 보아는 현대적인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인기를 더해 가, 일본, 타이완 및 홍콩에도 많은 군단의 팬들을 갖고 있습니다. 보아가 취입한 노래들은 한국에서 최고의 판매부수를 자랑하고 있지만 경계선 너머 북한 땅에서는 보아의 노래를 들을수 있을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전역에서는‘마이홈, 수잇 홈’으로 불리는 애국가 형식의 노래들만 라디오나 확성기들을 통해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 인권 운동가들은 북한에서 청취자들은 정부가 승인한 뉴스와 노래들만 들을수 있도록 라디오 수신기들이 유선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긴장되고 무장된 상황하에서 이뤄진 휴전으로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나, 이제 양측의 생활상에 대해서는 양쪽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만큼 달리 이질감을 표현해 줄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남쪽은 경제가 변영하고 거대한 수출 산업을 형성한 복수정당 체제 의 나라가 됐습니다. 그러나 북쪽은 독재자 김정일 주석이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난하면서 내부 지향적인 사회로 존재 하고 있습니다. 핵무기 제조노력을 둘러싼 최근의 세계적 우려로 인해 북한 사회는 더욱 더 고립되고 있습니다. 이곳 워싱턴에 소재한 전략 국제문제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으로 있는 데렉 미첼씨는 남북한이 언제나 좋은 격차를 보인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미첼씨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의 사정은 양측이 모두 제로 상태의 같은 수준에 있었으나 몇년 뒤에는 북한의 발전상이 남한을 약간 앞서갔으며 그런 현상은 1960년 중반까지 계속됐고 1970년 대로 넘어오면서 남한쪽의 우세로 전환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미첼씨는 그 무렵에 남한은 수출산업으로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기 시작해 그것은 서서히 민주주의 발전으로 이어져 갔다고 말했습니다. 남한에서 부와 민주주의를 형성해간 과정은 반드시 순탄치 만은 않았습니다. 남한은 1993년까지 일련의 독재 치하에서 전횡의 통치를 겪어야 했고 지난 1990년대 말에는 경제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의 기업체들은 오늘날 세계적 수준의 상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막강한 노조들은 근로자들의 높은 임금을 쟁취하고 이들에게 정치적 발언권을 제공함으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대화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 대사로 있었고 현재 뉴욕에 있는 한국 학회로 불리는‘코리아 소사이어티’의 회장인 도널드 그레그 씨는 한국이야 말로 막대한 성공을 거두어 지금까지 아시아에서는 가장 생동감 있는 민주주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레그 씨는 한국은 경제문제들을 극복했으며 한국민들은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면서도 북한과는 평화롭게 지내겠 다는 매우 흥미 있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았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으로 말머리를 돌리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뒤 북한에서 당시 전권을 장악한 지도자 김일성은 주체 사상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도입해 공산주의 체제 북한을 발전시키는 핵심 사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주체사상은 북한을 침체시키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북한은 남한을 그토록 부유하게 만든 무역과 국제투자 그리고 첨단기술 부문에 접할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냉전의 종식으로 북한이 구소련의 재정적 지원을 잃게 됐던 1990년 대 초에 상황은 더욱 악화됐습니다. 이어서 1994년에는 김일성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김정일이 국가 지도자가 됐습니다. 김정일은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숭배와 세계 최대 규모중의 하나인 자체의 군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부실 관리와 설상가상으로 일련의 자연재해가 들이 닥쳐 북한을 거의 파멸 직전으로 몰아갔습니다. 원조담당 기구들은 식량부족으로 인해 지난 10여년동안에 최고 2백만명의 북한주민들이 숨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레그 씨는 북한은 경제적으로 큰 실패를 겪은 나라라고 전제하고 소련의 무상 식량원조를 받던 북한은 소련의 멸망으로 원조가 끊기게됨에 따라 기아상태를 맞게됐으며 그로 인해 북한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급기야는 남한측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은 더 많은 국제원조로 자국경제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남한과 미국에 대해서는 비난을 가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남한이 미국의 꼭두각시 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은 핵개발 금지를 위한 여러가지 합의에도 불구하고 자체의 핵무기 개발 열망으로 인해 빚어진 분규에 휘말려 있습니다 그 속에 처한 북한의 대치적 상황으로 인해 북한은 손실을 보지 않아도 될 원조자금과 친선관계에서 손실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략 국제문제 연구소의 미첼씨는 북한은 계속 빈곤을 면치 못할 것이며 가까운 장래에는 고립될 수 밖에 없다고 전망했습니다.

미첼 씨는 북한이 근본적 변화를 취하게 될 것이지만 현재로는 그런 점이 엿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미첼씨는 이어 사실상 기본적으로 정치체제가 도전당할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북한이 경제성장을 위한 일부 (변화의) 여건을 조성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해리 투르만 전대통령은 1949년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간 이념분쟁에 있어서 한반도는 그 시험대가 된다고 선언했으며 그때의 그 선언은 지금도 사실처럼 우리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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