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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영의 남, 빈곤의 북 - 한국 전쟁 50년후의 극명한 남북 대조 - 2003-06-26


6월 25일은 6.25 전쟁 발발 53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3년반동안 계속된 한국 전쟁의 요인들을 되짚어 보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냉전 구도속에 남아있는 한반도 상황을 분석하는 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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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인민군병력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이어 한반도를 분단한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했습니다. 북한군보다 규모가 적고 군장비가 부족했던 남한군은 훈련이 잘된 북한군을 저지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성급히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뉴욕에 본부를 둔 미국의 민간단체,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인 도날드 그래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북한의 대남 침공은 일차적인 지원국이었던 구 소련의 지도자 조셉 스탈린과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뚱의 오산에 일부 근거했다고 설명합니다.

“스탈린과 마오쩌뚱은 오산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에따라 소련은 북한군을 무장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며 북한의 대남 침공이 시작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해리 S. 트루만 대통령은 북한군의 대남 침략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유엔군 파견을 허용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확보했으며,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유엔 회원국들은 한국 파견 유엔군에 신속히 자국군을 참여시켰습니다.

트루만 대통령은 대규모 미군병력을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장군은 북한군이 예상치 못했던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은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을 탈환했으며 그후 얼마지나지 않아 북한측은 3.8선을 남북한 분계선으로 다시 복귀 시킬 의도가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남한과 북한이 남한측의 통제하에 무력으로 재 통합될 수도 있다고 믿었고 그에따라 전투는 계속됐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유엔군은 북쪽으로 계속 진격했으며 11월에는 사실상 북한의 전지역이 유엔군에 점령됐습니다. 그러나 국경을 비밀리에 넘은 중국군 30만 병력은 유엔군을 신속히 후퇴시켰습니다.

도날드 그래그 전 주한미국 대사는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로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유엔군의 수가 무려 4만명에 달했다고 말합니다. 중국군에서는 90만명, 그리고 북한군에서는 5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중국군과 북한군측에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 전쟁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은 바로 소련의 스탈린이었다고 그래그 전 대사는 말합니다.

“중국은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지만 스탈린은 잔인한 메세지를 통해 ‘NO’라고 답변했습니다. 1953년 초 스탈린의 사망으로 6.25전쟁의 전투를 끝내는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당시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를 망각했습니다. 한반도는 실로 소련이 의도했던 격전장이었습니다. “

6.25 전쟁의 근원은 한반도의 오랜 역사에서 기인했습니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는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과거 수세기동안 각종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끝내 20세기 초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화 했으며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한반도를 통치했습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은 일본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고 자국군을 한국에 파견한 후 3.8선 이북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했습니다. 미국은 당시 3.8선 이남 지역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수년후 소련과 미국 점령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부가 그리고 남한에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도움을 받아 북한군에게 남한을 침공하도록 명령했습니다.

1953년 7월 6.25 전쟁이 중단됐을 때 남한과 북한 양측은 황폐화 됐으며 35년에 걸친 일본의 식민지 통치 종식과 함께 한반도를 뒤덮었던 뜨거운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정식 조약체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취약한 정전협정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냉전이 종식됐음에도 불구하고 6.25 전쟁을 촉발시킨 남북한 사이의 이념 차이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미국은, 북한의 또다른 남침을 저지하고, 북한이 만약 도발한다 해도 이를 방어하기 위해 남한에 3만 7천 여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미군 주둔으로 형성되는 한반도의 안정으로 남한은 시장 경제를 발전시키며 번영을 구가할수 있었습니다.

북한은 남한과는 대조적으로,우방국이 거의 없이 국제사회에서 극도로 고립된 나라입니다. 국가 경제의 부실 운영과, 계속된 자연 재해로 북한의 경제는 파산 직전에 처해 있습니다.

이곳 와싱톤에 있는 전략 국제 문제 연구소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의 선임 연구원인 데렉 미첼 (Derek Mitchell) 입니다.

“아직도 분쟁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한국 전쟁의 유산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의 결과 동아시아 지역은 발전되고 경제적으로 활성화 되었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북한의 상황은 완전한 실패작입니다. 이러한 두 상치된 상황은 두가지 서로 다른 극명한 사례라고 볼수 있습니다. 활성화된 자본주의및 자유, 반면에 폐쇄된 사회, 두 대조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냉전시대의 냉혹한 현실인것입니다.”

2003 년 10 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위해 농축 우라늄을 제조해왔음을 인정했다고 미국 정부가 발표했을 때, 북한에 대한 전세계의 우려가 또다시 제기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북한은 폐쇄되었던 핵 시설을 재가동하고, 최근에는 이미 핵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일련의 도발적인 행동을 취해 왔습니다.

한국의 노 무현 대통령은, 북한과의 합작 계획이나 경제 원조를 통해서, 전임 김대중 대통령이 추구했던 햇볕 정책을 유지할 것을 공개 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 무현 대통령까지도 최근에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가리켜 “용인할 수 없는 것” 이라고 불렀고, 남한은 어느정도 미온적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북한을 상대로 형성되고 있는 북한에 맞선 국제 동맹세력의 일원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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