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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 교의 시선에서 본 세계사(2)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 교의 시선에서 본 세계사(2)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 교의 시선에서 본 세계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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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저희 VOA 세계뉴스를 통해 거의 매일 중동 관련 뉴스를 접하고 계시지만, 중동 국가들이나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잘 아시는 분은 드물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학교에서 자세히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고요. 대부분의 역사책들마저 이슬람의 역사를 부분적으로 간략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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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에도 미국 등 서양 강대국들과 중동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드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슬람의 관점에서 세계 역사를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서기 610년경 마호메트는 동굴에서 명상을 하다가 신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슬람교의 사상은 당시 메카의 다신교 신앙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심한 박해를 받았다. 마호메트를 미워하던 사람들이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자, 마호메트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야드리브로 떠났다.”

네, 야드리브는 나중에 ‘예언자의 도시’란 뜻의 ‘메디나’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요. 서기 622년 7월 16일,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이 사건을 ‘헤지라’라고 부릅니다. ‘헤지라’는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히는데요. 이슬람 달력인 헤지라력은 마호메트가 메디나로 이주한 서기 622년을 원년으로 삼고 있습니다.

메디나로 이주한 마호메트는 그 곳의 내분을 수습하고, 지도자로 추대됩니다. 마호메트는 메디나를 이슬람 사회로 통합하고, 군대를 양성했고요. 정치와 종교가 일치하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의 모체를 만들었는데요. 헤지라 전에 마호메트는 신의 계시를 전하는 선지자, 이슬람교를 전파하는 전도자 역할을 했을 뿐이지만, 헤지라 이후에는 종교뿐만이 아니라, 입법, 정치, 사회를 모두 관장하는 이슬람 사회의 지도자가 됐습니다.

주변 부족들을 끌어들이며 세력을 확장해나간 마호메트는 서기 630년 드디어 메카에 입성했고요.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각지의 부족들이 마호메트와 동맹을 맺으면서,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교 아래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안사리 씨//
“마호메트가 사망한 직후에 다음 지도자를 어떤 방식으로 선출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함께, 앞으로 이슬람 사회의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냐, 또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이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역사학자인 타밈 안사리 씨의 얘기처럼 632년 6월 4일, 마호메트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사망하자, 이슬람 사회는 큰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단순히 누가 다음 지도자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인데요. 마호메트의 죽음은 성자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한 나라 왕의 죽음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메디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메카에서 마호메트와 함께 온 이주민들을 제외시킨 채 단독으로 지도자를 뽑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요. 이슬람 사회가 붕괴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아부 바크르는 마호메트의 측근이었던 사람들을 불러모아 메디나 인들의 회의장에 나타났다.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 교도들의 지도자는 한 사람이어야 한다며, 메디나 인들을 설득했다. 선지자도 아니고, 왕도 아닌, 모든 회의를 주재하고 이슬람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우마르와 다른 한 사람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자 우마르는 깜짝 놀라며, 아부 바크르를 제치고 자신이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마르는 마호메트가 세상을 떠난 지금, 이슬람 사회를 이끌 사람은 아부 바크르밖에 없다며 울면서 호소했는데요. 우마르의 연설에 감동한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아부 바크르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자신의 칭호를 칼리프라고 했습니다.

//안사리 씨//
“제일 처음 이슬람 사회 지도자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가 ‘칼리프’란 칭호를 택했습니다. 칼리프는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란 뜻인데요. 마호메트의 대리인이란 말입니다. 상당히 겸손한 표현이죠. 마호메트가 세상에 없는 동안, 그 대리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칼리프란 칭호를 썼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법을 제정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마호메트가 남긴 여러 가지 정책과 법을 수행하는 임무만 하겠다고 약속했죠.”

‘방해 받은 운명: 이슬람 교도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사’의 저자인 역사학자 타밈 안사리 씨였습니다. 칼리프가 다스린 나라를 칼리프 국가라고 부르는데요. 칼리프는 정치와 종교의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칼리프 아래 이슬람 사회는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는 마호메트가 사망한 후 일부 부족장들의 반란을 제압한 뒤에 아라비아를 통일했고요. 제2대 칼리프인 우마르는 정복전쟁에 나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이집트를 점령했습니다. 또 사산 조 페르시아를 멸망시켰습니다. 제3대 칼리프인 오트만은 메카의 상인 귀족인 옴미아드가 출신이었는데요. 중요한 자리에 친척들을 임명했다가 불만을 사서 암살당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마호메트의 사촌이자 사위였던 알리가 제4대 칼리프 자리에 올랐습니다.

//안사리 씨//
“칼리프 선출 방식은 약간 모호합니다. 그 방식이 확실히 정해져 있지 않았어요. 초대 칼리프였던 아부 바크르는 위원회에서 선출됐지만요. 아부 바크르는 죽기 전에 우마르를 후계자로 추천했고, 위원회에서 이를 승인했죠. 제2대 칼리프가 된 우마르가 칼리프 선출 방식을 정했는데요. 6명으로 구성된 선출위원회를 만들고, 다음 칼리프를 선출하도록 했죠.”

하지만 이 같이 선출에 의한 칼리프는 4대에서 그치게 됩니다. 제4대 알리 때 분쟁이 발생해서, 옴미아드 가의 무아위야가 무력으로 칼리프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느낀 무아위야는 아랍 부족의 지도자들을 모아 다음 후계자를 정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아랍 부족의 족장들은 무아위야가 진정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불렀다고 생각해서, 서로 다른 후보들의 장점과 단점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때 무아위야의 심복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무아위야를 가리키며 ‘지금은 이 분이 이슬람 교도들의 지도자다’라고 소리쳤다. 이어 그는 무아위야의 장남인 야지드를 가리키며, ‘무아위야가 세상을 떠난다면, 이 분이 우리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만약 여기에 반대한다면 이것뿐’이라며 칼을 빼 들었다.”

족장들은 모두 그 말 뜻을 알아들었습니다.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는 흉내를 냈지만, 결국에는 무아위야의 장남인 야지드를 다음 칼리프로 선출했는데요. 이로써 세습 칼리프 제도와 함께 옴미아드 왕조가 시작됐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서기 632년에서 661년으로 이어지는 제1대에서 제4대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 라고 부릅니다.

//안사리 씨//
“옴미아드 가는 사실 메카에서 마호메트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입니다. 옴미아드 가는 원래 이슬람을 몰아내려고 애썼는데요. 세 차례 전쟁 이후, 마호메트가 다시 메카에 돌아와 카바 신전의 우상들을 파괴했을 때,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 뒤 옴미아드 가 사람들은 매우 신실한 신도들이 됐는데요. 나중에 권력 다툼에서 승리해서, 이슬람 사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서게 된 겁니다.”

역사학자 타밈 안사리 씨였습니다. 옴미아드 왕조 당시 이슬람 영토는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를 지나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에 이르렀습니다.

옴미아드 왕조와 함께 종교적 사건으로서 이슬람 세계의 탄생은 끝이 났는데요. 하지만 정치적 국가로서, 문명국으로서 진화과정이 시작됐습니다. 옴미아드 왕조 때, 수도를 다마스커스로 옮겼고요. 아랍어를 공식언어로 정하면서, 지배 지역의 아랍화와 이슬람화를 이뤘습니다.

//안사리 씨//
“이슬람 세계를 정상화하고, 관료제도와 행정부를 세우고, 도로와 세금제도를 정비했습니다. 또 정규 군을 양성하고, 각 지방에 총독을 임명하는 등 정상적인 국가 체제를 닦았죠. 그런 과정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지만 적도 많이 만들었는데요.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커지면서, 결국 아바스 가 후손에 의해 밀려났죠.”

옴미아드 왕조는 마호메트의 숙부였던 아바스의 자손에 의해 쫓겨났는데요. 아바스 가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면서 권력을 잡았지만, 실상은 옴미아드 왕조와 별로 다르지 않았고요. 오히려 더욱 세속적인 국가의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안사리 씨//
“이 두 왕조를 거치면서, 그러니까 이슬람 역사에서 첫 3백 년 동안, 이슬람 문명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흔히 샤리아라고 부르는 이슬람 율법이 이 때 정리됐죠. 그러면서 종교학자들이 이슬람 사회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특히 아바스 왕조 때는 그리스 사상의 재발견이라든지, 비종교적인 학문 연구도 많이 지원했습니다. 수학과 의학, 생물학, 또 지질학과 화학, 물리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졌죠.”

아바스 왕조의 제2대 칼리프였던 알-만수르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수도 바그다드를 건설했는데요. 20년 뒤 바그다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면서, 상업의 중심지가 됐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제5대 하룬 알-라시드 때 아바스 왕조는 전성기를 누렸는데요. 8세기말 이 때를 역사학자들은 이슬람의 황금기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사리 씨에 따르면, 11세기말에 이르자 정치적으로 통합된 이슬람 국가에 대한 꿈이 깨지게 됩니다. 칼리프 국가가 너무 비대해졌기 때문이었는데요. 당시 기술로는 바그다드에 앉아서 인도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이베리아 반도와 이집트에 새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슬람 세계가 분열하는 가운데, 동북쪽에서는 셀주크 투르크 족이 밀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이슬람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계사를 전해 드리고 있는데요. 이에 관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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