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 가능 링크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4)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4)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4)
<!-- IMAGE -->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노예제도,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노예제도는 고대부터 수천 년 동안 내려왔습니다. 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움직임은 18세기말 영국에서 시작됐는데요. 당시 노예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노예매매의 심장부에서 노예제도 폐지운동이 싹튼 것인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노예제도의 폐지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 IMAGE -->

“1769년 미국 매사추셋츠 주 보스턴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 제임스 서머셋이 주인을 따라 영국 런던으로 건너왔다. 2년 뒤 서머셋은 주인을 피해 달아났지만 50여 일만에 붙잡혔고, 자메이카의 농장으로 팔려갈 처지에 놓였다. 서머셋이 퀸 메리 호 배에 갇혀 있는 가운데, 존 말로 등 영국인 세 사람은 서머셋을 풀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네, 노예폐지운동의 이정표가 됐던 서머셋 사건입니다. 흑인 노예 제임스 서머셋은 재판에서 승리를 거두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는 노예폐지론자 그랜빌 샤프의 도움이 컸습니다.

//앨리슨 교수//
“그랜빌 샤프가 법정에 가서 노예제도는 인권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자연법에도 위배된다고 주장한 겁니다. 그 나라 법으로 노예제도가 합법이라고 규정한 곳에서나 합법이지,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노예제도가 불법이었다는 건데요. 예를 들어서 미국의 매사추셋츠 주 의회는 평생 주인에게 봉사해야 하는 노예제도를 인정했기 때문에 매사추셋츠 주에서는 노예제도가 합법이란 거였습니다. 하지만 영국 의회는 노예에 대한 권리 주장을 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러니 영국에서 서머셋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 다시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서포크 대학교 역사학과 로버트 앨리슨 교수의 설명이었습니다. 영국 대법원장이던 맨스필드 경이 그랜빌 샤프의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서머셋은 자유의 몸이 됐는데요. 이 사건은 노예폐지운동에 있어서 첫 번째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국에서 노예매매가 법으로 금지된 것은 그로부터 35년 뒤인 1807년의 일이었고요. 1833년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도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1789년 자유와 평등, 박애를 내세운 혁명의 물결이 프랑스를 뒤흔들었다. 프랑스 혁명은 대서양 건너 프랑스 식민지 아이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 자크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이 노예제도에 의구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이들은 1789년 8월에 발표한 ‘인권선언’에서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장소와 시간을 초월해 보편적이라고 선포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이 같은 선언 내용이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해당된다고 규정했는데요. 하지만 식민지 농장 주인들이 크게 반발하자, 한 걸음 물러서 노예들을 여기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티 노예들이 반발했는데요. 노예 출신인 투생 루베르튀르가 프랑스에 대항해서 아이티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역사학자 로버트 앨리슨 교수입니다.

//앨리슨 교수//
“흑인으로서 나중에 장군이 된 투생 루베르튀르는 그 시대의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00년대 초에 나폴레옹이 군대를 보내서 아이티 내전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루베르튀르 장군이 이끄는 노예군이 나폴레옹 군대를 격파했거든요.”

그러니까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 당시 산도밍구로 불리던 아이티는 노예들의 혁명에 의해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인데요. 아이티는 서반구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 독립국가가 됐고요. 프랑스는 1827년에 노예매매를 금지한 데 이어, 1848년에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1776년 7월 4일에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문 내용입니다. 이처럼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모두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은 “흑인 노예를 부리는 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큰 소리로 자유를 외칠 수 있느냐”며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역사학자 로버트 앨리슨 교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사이에 노예를 소유하는 것이 위선이고, 노예제도는 비도덕적이란 인식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앨리슨 교수//
“미국 독립운동 세대들은 언젠가 노예제도가 폐지될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미국의 건국 이념에 어긋나기 때문에 결국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미국에서 목화 농장이 발달하면서 노예제도로 얻는 이익이 점점 커진 겁니다. 1815년에서 1830년대까지 시기에 미국인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의 건국이념에 맞게 노예제도를 폐지할 것이냐, 아니면 노예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평등 사상을 포기할 것이냐 하고 말입니다. 결국 노예제도의 수익성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압도적으로 평등 사상을 포기하게 된 거죠.”

이후 미국 내 여러 주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남부 미시시피와 앨라바마 등에서는 노예제도가 더욱 확산된 반면, 북부 오하이오와 인디애나, 일리노이 등지에서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인데요.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제일 먼저 폐지한 주는 매사추셋츠였습니다.

“쿽 워커는 매사추셋츠 서부 우스터 군에 거주하는 제임스 캘드웰의 노예였다. 제임스 캘드웰은 워커가 25살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주인 캘드웰은 워커가 10살 때 사망했고, 캘드웰 부인은 새로 나다니엘 제니슨이란 사람과 재혼했다. 그러나 1774년 캘드웰 부인마저 사망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새 주인이 된 제니슨은 워커를 풀어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28살이 된 워커는 옛 주인 제임스 캘드웰의 형제들인 세스 캘드웰과 존 캘드웰의 농장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제니슨은 워커를 찾아와, 그 동안 다른 농장에서 번 임금을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쿽 워커는 법원에 소송을 냈는데요. 쿽 워커의 변호사는 노예제도가 1780년에 제정된 매사추셋츠 주 헌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매사추셋츠 주 헌법은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자유로우며, 자신의 삶과 재산 등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쿽 워커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담당 판사가 여기에 동의하면서 매사추셋츠 주에서 노예제도가 불법으로 규정됐고요. 이어 다른 주에서도 노예제도가 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앨리슨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앨리슨 교수//
“비슷한 시기에 펜실베니아에서도 점진적인 노예해방법을 채택하는데요. 1781년 7월 4일 이후에 태어난 노예들은 나이가 21살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781년 7월 3일에 태어난 사람은 평생 노예지만 최소한 그 사람이 낳는 자녀는 21살이 되면 노예에서 해방된다는 거죠. 다른 북부 주들도 1780년에서 1810년에 이르는 시기에 점진적인 노예해방법을 채택했습니다.”

또한 1812년 전쟁 당시 영국과 미국은 서로 자국 군에 가담해 싸우는 흑인 노예들은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요. 이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미국 북부에서 해방노예의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됐습니다. 그리고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9월,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제16대 대통령은 반란을 일으킨 주들의 노예들을 모두 해방한다는 노예해방령을 발표했습니다.

//앨리슨 교수//
“링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연방을 구하는 일이었지, 사실 노예제도 폐지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노예해방선언은 노예제도 폐지에 있어서 첫 번째 조치였고요. 곧 링컨 대통령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의 헌법수정안을 추진합니다. 남북전쟁 기간에 자유의 몸이 된 노예들이 나중에 다시 노예로 되돌아가는 걸 원치 않았거든요.”

처음 미 의회는 이 같은 헌법수정안을 거부하지만 링컨 대통령은 계속해서 압력을 넣었고요. 1865년 1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내용을 담은 헌법수정안 제13조가 마침내 미 의회에서 통과됐습니다. 그리고 각 주의 비준을 거쳐 그 해 12월에 정식으로 발표되면서 미국 내 흑인 노예들은 법적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됐습니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는 노예제도는 현재 세계 모든 나라에서 불법입니다. 20세기 들어서까지 이 같은 관행을 유지하던 아랍 국가들도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에 대부분 노예제도를 폐지했고요. 1981년 서아프리카의 모리타니가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현재 노예제도는 세계 어느 나라 정부로부터도 합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노예제도는 인신매매의 형태로 살아있다고 인권운동가들은 주장하는데요. 불법 이민자들이 노예와 같은 상황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거나,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강제로 매춘에 시달리는 현대판 노예제도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그 동안 4회에 걸쳐 서양 노예제도의 역사를 살펴봤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더욱 재미있는 화제로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부지영이었습니다.

관련 뉴스

XS
SM
MD
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