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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노예제도의 역사 (1)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도망노비를 다룬 ‘추노’란 연속극이 인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조선시대 노비제도에 관해 알아봤는데요. 인간이 자유를 뺏긴 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되어 노동에 시달리는 노예, 노예제도는 서양에서도 오랫동안 존속해왔습니다. 특히 백인 상인들에 의해 강제로 신대륙에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은 조선시대 노비들보다도 더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서양 노예제도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텔레비전 영화 '요셉’은 기독교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인데요. 주인공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형들의 시기를 받습니다. 요셉을 미워한 형들은 아버지 몰래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 넘기는데요. 노예시장에 끌려 나온 요셉이 이집트 관리에게 팔리는 장면으로 영화 ‘요셉’은 시작합니다.

이처럼 인간을 가축처럼 사고팔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노예제도는 수천 년 전 구약성경의 시대, 아니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앨리슨 교수//
“인간의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에나 어떤 형태로든 노예 노동이 존재했습니다. 노예 노동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예속돼서 보수도 제대로 받지 않고 일하는 걸 말하는데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도 노예들에게 의존했습니다.”

미국 서포크 대학교 역사학과 로버트 앨리슨 교수의 얘기를 들으셨는데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들은 노예들 덕분에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겁니다. 로마제국의 절정기에는 시민 한 사람당 노예의 비율이 20명에 달했다고 하는데요. 결국 로마제국의 찬란한 문화는 노예들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절정기를 누리던 서기 180년…… 죽을 날이 머지않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평소 총애하던 장군 막시무스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분노에 사로잡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코모두스는 막스무스를 반역자로 몰아 막시무스와 그 가족을 모두 죽이려고 하는데……. 혼자서 간신히 살아남은 막시무스는 노예 신세가 되고…… 검투사가 돼 코모두스에게 복수할 날을 기다린다……”

지난 2000년에 리들리 스캇 감독이 발표한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내용입니다. ‘글래디에이터’는 검투사란 뜻인데요. 이 영화의 내용은 대부분 허구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막시무스처럼 고대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반역으로 몰리거나 전쟁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앨리슨 교수//
“각 사회에서 노예제도는 조금씩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경우, 유럽인들이 와서 노예매매를 시작하기 전에는 전쟁포로나 범죄자들이 노예가 됐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노예가 성공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이슬람 사회, 오스만 제국에서는 노예가 출세해서 높은 관리가 되는 경우가 있었죠. 왜냐하면 야심 많은 신하에게 자리를 뺏길 것을 우려한 황제들이 자신의 노예를 관리로 앉히곤 했거든요. 보통 노예들은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말을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꽤 쓸모가 있었죠.”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었고요. 대부분 노예들의 삶은 절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 했는데요.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면 매를 맞기 일쑤였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고대 이래 노예는 특권층의 중요한 노동력이 돼왔는데요. 중세에 들어서는 노예보다 좀 더 자유로운 존재인 농노가 대부분의 생산력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전쟁에서 사로잡힌 포로들을 노예로 부리기도 했는데요. 역사학자 로버트 앨리슨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앨리슨 교수//
“십자군 전쟁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와 중동의 이슬람 세계가 충돌한 전쟁을 말합니다. 양측이 다 십자군 전쟁에서 많은 전쟁포로를 얻었고요. 이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부렸던 겁니다.”

십자군 전쟁에 나간 유럽인들은 신기한 동방의 문물을 새로 접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설탕은 단숨에 유럽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앨리슨 교수//
“당시 유럽인들에게 단것이라곤 꿀밖에 없었거든요. 설탕이 유럽에 전해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주 귀하게 여겨서 약으로 쓸 정도였죠. 사탕수수는 십자군 전쟁 때 유럽에 전해져 지중해의 여러 섬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는데요. 원래 사탕수수 재배는 노예들이 담당했습니다. 지중해 섬에서는 전쟁포로들이 이 일을 했죠.”

앨리슨 교수는 지중해 섬의 농장 주인에게 전쟁포로를 임대하는 형식으로 사탕수수 농사가 이뤄졌다고 설명하는데요. 십자군 전쟁기간 동안 끊임없이 전쟁포로들이 양산됐기 때문에 노동력에 대한 걱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3세기말, 수백 년 동안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동시에 노동력을 제공했던 전쟁포로의 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앨리슨 교수//
“그러자 농장주들은 흑해 연안의 서카시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노예매매를 했습니다. 당시 노예상인들은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베네치아 공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큰 이득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카시아나 아르미아,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고, 제대로 방어능력도 없었습니다. 지중해에서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니까, 이들 나라들끼리 전쟁을 벌인 거죠. 서로 상대국 주민들을 전쟁포로를 잡아서 노예로 팔려고 말이죠.”

당시에는 이교도를 노예로 삼는 일이 법으로 가능했습니다. 기독교도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을 노예로 삼곤 했는데요. 하지만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1425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기독교도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일이 늘어나자 카파의 제노바 상인들에게 칙령을 내린다. 기독교도들을 노예로 파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며 위협한 것이다. 하지만 제노바 상인들은 이런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교황의 위협 때문에 포기하기에 노예매매는 너무나 이득이 큰 장사였던 것이다.”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는 사이, 아시아와의 교역에 관심이 있었던 포르투갈은 동방으로 가는 다른 바닷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그린스보로 대학교 로렌 슈웨니거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슈웨니거 교수//
“포르투갈이 중동으로 가는 바닷길을 찾다가 서아프리카에 들리게 됩니다. 1488년에 현재의 케이프 타운 지역과 아프리카 동부에도 들렸는데요. 그들이 원하는 부, 보물이라든가 돈이 될만한 물건을 찾지 못했죠.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서아프리카의 세네갈 강과 나이지리아 강 유역에서 금과 노예를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1400년대 말에 일어난 일이죠.”

그러면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교역을 하게 됩니다. 서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나는 산물을 수입하기 시작했는데요. 현재의 기니가 있는 서아프리카 지역에는 상당한 양의 금이 묻혀 있었고요. 또 아프리카에는 소금도 풍부했습니다. 서포크 대학교 역사학과 로버트 앨리슨 교수입니다.

//앨리슨 교수//
“금 생산자들이나 소금 생산자들 모두 노예가 필요했습니다. 포르투갈 인들은 구두나 소총과 같은 제조품을 갖고 가서 아프리카 산물과 교환했는데요. 아프리카와의 교역은 포르투갈 인들에게 굉장한 이득을 안겨줬습니다. 포르투갈 인들은 또 아프리카 카포베르데 제도의 섬들을 발견해서 그 곳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죠.”

당시 아프리카에는 유럽의 노예와 비슷한 노예제도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3백 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며 부족들 간에 갈등이 많았던 아프리카 인들은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역사학자 로렌 슈웨니거 교수입니다.

//슈웨니거 교수//
“세네갈 강에서 콩고 강에 이르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무려 3백 개가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부족들 간에 갈등도 많았죠. 그렇게 다양한 부족이 살면서 서로 싸우고 있었는데요. 그러면서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을 노예로 팔았던 겁니다. 나중에는 다른 마을 주민들을 납치해서 노예로 팔기도 했죠.”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할 무렵 스페인 역시 아시아로 가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방으로 가는 길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봉쇄당한 상태였는데요. 그 때 이탈리아 제노바 평민 출신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에 나타났습니다.

“15세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고 있었다. 배를 타고 바다 끝에 이르면 폭포처럼 아래로 떨어질 거라며 두려워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달랐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고, 배를 타고 계속 가면 인도에 이르게 될 거라고 믿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후원 아래 배 세척과 선원 80여명을 이끌고 대 장정에 나섰다. 콜럼버스는 며칠 만에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가도가도 바다는 끝이 없었다. 두 달이 넘는 항해에 지친 선원들이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지만 콜럼버스는 굴하지 않았고…… 곧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를 잘라도 좋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1492년 10월 12일 새벽, 저 멀리 수평선에 육지가 보였다.”

바로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콜럼버스가 찾고 있었던 인도는 아니었지만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의 역사를 바꿔놓게 되는데요. 이와 함께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 눈물로 얼룩진 비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신대륙의 발견이 흑인 노예 매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에 관한 얘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다음 시간도 기대해 주시길 바라고요. 지금까지 부지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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