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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조선시대 노비제도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추노’란 연속극이 화제라고 합니다. ‘추노’는 도망간 노비를 잡아오는 걸 뜻하는데요. 연속극 ‘추노’는 빼어난 영상과 쫓고 쫓기는 자 사이의 숨막히는 추격전 등 볼거리가 풍부해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사극과는 달리 피지배 계층인 노비들을 다뤘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조선시대 노비제도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연속극 ‘추노’…… 억울하게 반역으로 몰려 노비가 된 무장 송태하와 도망간 노비를 쫓는 일이 직업인 추노꾼 이대길, 그리고 두 남성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노비 출신 여성 김혜원이 주인공입니다. 추노꾼 이대길은 조선 최고의 무장에서 도망 다니는 노비 신세가 된 송태하를 끊임없이 추격하는데요. 이처럼 도망친 노비를 쫓는 전문적인 노예 사냥꾼이 한국 역사에 정말로 존재했을까요?

//이명학 교수//
“한국의 역사상 그런 기록은 없고요. 과거에 그런 노비 중에서 달아난 사람들이 있는데요. 관청에서 했지, 개인이 그렇게 직업적으로 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성균관 대학교 이명학 교수였습니다. 도망친 노비를 찾는 ‘추노’ 행위는 있었지만, 이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건데요. 도망친 노비를 잡아들이는 기관은 고려시대에도 존재했고요. 조선 시대에는 추쇄도감이란 기관에서 이 일을 전담했습니다.

//이명학 교수//
“도망간 노비도 있고요. 신분제 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지방에서 살고 있는 노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세금들을 안 내고 문제가 있으니까 정부에서 추쇄도감을 만들고, 추쇄관을 파견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 동안의 밀린 신공을 받고…….”

사실 추노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도망간 노비를 찾아서 데려오는 일을 추노라고 하지만요. 따로 독립해서 생활하던 외거노비에게 신공을 징수하는 일, 즉 몸값을 받아오는 일도 추노라고 합니다. 추노는 조선 후기에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빈번해진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 같은 사실은 노비와 주인 사이의 갈등을 다룬 추노계 소설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충청도 해미현에 김 씨 여인이 있었는데, 모재 김안국의 7세손 덕강의 딸로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외숙 집에 의탁해 살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 면천에 사는 황탁의 둘째 아들 동로와 혼인을 한다. 가난한 시집 살림이지만 잘 꾸려나가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종제 김언규와 영광에 살고 있는 선대의 노비를 추노하기로 의논하고 그 일을 남편 동로에게 부탁을 한다.” (김씨 남정기)

가장 오래된 추노계 소설로 알려진 ‘김씨 남정기’의 내용입니다. 양반이지만 가난했던 김 씨와 남편 황동로는 선대 때 달아난 노비들을 찾아 몸값을 받으려고 하는데요. 추노란 단어는 일반 명사라기 보다는 조선 후기 사회경제를 대변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고 이명학 교수는 설명합니다.

//이명학 교수//
“조선 후기가 되면 양반들이, 관직에 나가는 양반 숫자가 적어지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일정하게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옛날의, 선대 때 있던 노비들이 사는 것을 알고, 그 쪽에 가서 그 동안의 밀린 신공, 그러니까 몸값을 받으러 가는 일들이 많이 있었죠.”

‘김씨 남정기’는 18세기 초반에 전라도 영광에서 실제로 일어난 ‘황동로 추노 사건’에 기반을 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충청도에 살았던 양반 황동로는 부인 김 씨 가문이 몰락하고 사노비들이 도망가자 처가를 대신해 추노에 나섰던 것입니다.

“동로는 그 일을 부탁받고 영광에 내려갔다가 박천강 등 노비들에게 봉변만 당하고 겨우 돌아온다. 다음 해 박천강이 찾아와 대흥에 사는 신삼징이 자신이 상전이라고 우기는 데 진짜 상전만 밝혀지면 신공을 바치겠다고 한다. 대흥으로 가서 판결을 받고 다음 해 다시 추노를 떠나지만 소식이 끊어진다…… 그 뒤 외숙 조상선으로부터 동로가 노비 박천강, 천명 형제의 손에 살해됐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김씨 남정기)

네,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 씨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영광으로 내려가는데요. 하지만 노비 박천강 일행은 고부로 달아난 뒤였습니다. 김 씨는 고부까지 찾아가 군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데요. 이미 박천강에게 뇌물을 받은 고부 군수가 소극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김 씨는 좌절하지만 결국 기지를 발휘해서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는 내용인데요. ‘김씨 남정기’를 보면 한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당시 노비들은 사회 최하층 천민 계급에 속했는데, 어떻게 감히 양반을 살해할 생각을 했을까 하고 말이죠.

//이명학 교수//
“지방에 가 있는 노비들의 경제력이 상승이 되면서 지방 아전들, 지방 관원들하고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지고 관아의 후원도 있고 하다 보니까, 서울서 온 양반이나 일반 양반들은 신분만 양반이지, 하등의 옛날 양반의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양반이 내려왔을 때 지방에 있던 노비들이 지방 아전들하고 결탁하든가, 아니면 자기들의 커진 세력을 믿고 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노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의 소유물이었던 사노비가 있는데요. 사노비는 다시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나뉩니다. 이정수 동서대학교 교양교육원장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이정수 원장//
“사노비 중에서도 주인집이나 주인집 근처에서 주인의 명령에 언제든지 동원되는 집안노비, 앙역노비라고 합니다. 역을 주로 받드는 노비가 있고요. 그 외에는 주인가에서 멀리 떨어져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면서 주인에게 1년에 세금만 바치는 외거노비, 이렇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주인가의 근처에 있는 노비들을 앙역노비, 솔거노비라고 하는데, 솔거노비들은 신분적으로 외거노비에 비해서 주인에 대한 예속도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솔거노비들은 전형적인 노예로서 아주 열악하고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비록 서양과 같은 노예시장은 없었지만 재산이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고요. 매매와 상속, 증여가 가능했습니다. 조선 영조 때 학자 이익이 노비법을 규탄하며 노비 매매만이라도 금지하란 주장을 폈던 것을 볼 때, 노비 거래가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노비나 외거노비의 경우 개인적으로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모으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정수 원장//
“그런 점에서 서양 노예하고 틀린 것 같습니다. 서양 노예는 자신의 가족이라든지, 또 자신의 재산 소유라든지, 이런 부분이 굉장히 제한적인데, 한국의 노비, 특히 외거노비 같은 경우는 자신의 재산을 갖는 것이 이전부터, 조선 시대 이전부터 가능했고, 특히 조선 시대에는 자기 재산을 자유롭게 매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노비 같은 경우는, 관청에 소속된 노비들 같은 경우는 상당히 자유롭게 출퇴근이 가능하고…….”

한반도에서 노비제도는 고대부터 존재했습니다. 고조선의 팔조법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란 조항이 있었던 걸로 볼 때, 이미 그 때부터 노비제가 시행됐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정수 원장//
“고대로 갈수록 전쟁이 굉장히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전쟁이 가장 중요한 노예의 공급원이 되고요. 내부적으로 보면 빈부차에 따른 매매노비, 또 형벌노비가 많죠. 점차 시대가 근대로 가까워질수록 경제적인 요인의 노비들, 신분 세습적인 노비들이 많다고 봐야 되겠죠.”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주인에게서 달아나는 노비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피부색이 다른 미국의 흑인 노예들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노비들이 도망가더라도 잡아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도망갔던 노비를 잡아와서 남자는 남자 종을 뜻하는 ‘노’, 여자는 여자 종을 뜻하는 ‘비’자를 얼굴에 문신으로 새기는 장면이 연속극 ‘추노’에 나오는데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시 이정수 원장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이정수 원장//
“정확한 물증은 없습니다. 아마 조선 전기 단계에서는 실제적으로 노비가 도망했을 때 그런 낙인을 찍었을 확률이 많은 것 같고요. 후기로 올수록 노비의 도망이 굉장히 일상화되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겠느냐, 국가도 노비에 대해서 훨씬 더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아마 힘들었을 거다 보는 거죠.”

그렇습니다.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 도망간 노비를 추적하는 추쇄를 금지시키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는데요. 국가 재정이 쪼들리게 되면서 양인 수를 늘리기 위해 국가에서 자주 면천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노비들이 천민의 신분을 벗고 양민이 돼서 국가에 세금을 바치도록 했던 것이죠.

“조선 후기에 이르러 도망한 노비들이 노비 추쇄가 금지된 변방으로 모여들었고, 조정은 공공연히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남해의 각 섬에서도 추쇄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한 노비들이 섬으로 모여들기도 했다. 하지만 조정은 영토정책의 일환으로 도망한 노비들의 섬 정착을 묵인했다. 말하자면 노비들이 도망하여 정착할 수 길을 열어줬던 것이다.”
(박용화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이 같은 노비 면천은 영조 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는데요. 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노비 문제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확대되면서 조정에서 노비제도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노비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신분제의 변동이 활발해지면서 노비 중에 재산을 축적한 자는 납속이나 관리와의 결탁을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하는 경우도 늘어났습니다.

//이정수 원장//
“19세기 이후로 가면 노비제는 실제적으로 국가적으로도 그렇고, 민간에서도 노비제 해체는 급격하게 이뤄졌다 볼 수 있는데, 노비 소유주의 입장에서 볼 때도 노비들의 도망이다, 태업이라든지, 저항이 굉장히 거세지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노비를 관리하는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듭니다. 노비를 헐값에라도 매각하고, 당시 자유롭게 있는, 노동 시장에 있는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고용노동, 이것이 더 노비 소유주의 입장에서 경제적인 실리가 있다고 되는 거죠.”

수천 년 동안 핍박의 상징이던 노비는 1810년 순조 대에 들어서 해방의 물결을 타게 됩니다. 당시 공노비 6만여 명의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방면함으로써 공노비 혁파가 이뤄졌던 것인데요. 그리고 1886년 고종 23년에 노비의 세습을 금하는 부분적인 개혁을 거쳐, 1894년 갑오개혁 때 공사 노비제를 모두 없애고 인신매매를 금지함으로써 법적으로는 노비제가 완전히 폐지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조선시대 노비제도에 관해 알아봤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서양 노예제도의 역사를 들여다보겠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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