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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중국 위나라의 기틀을 닦은 조조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지난 해말 중국 허난 성에서 조조의 무덤이 발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조조는2세기말에서 3세기초에 걸쳐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한 정치가이자 무장입니다. 이번에 발견된 무덤이 실제로 조조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요. 일단 중국 국가문물국이 진짜라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기 때문에, 곧 국가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입니다. 이에 따라 조조의 무덤을 찾는 관광객들도 늘어나고, 조조에 대한 관심도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중국 위나라의 기틀을 세운 조조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들으시는 노래는 싱가포르 가수 제이제이 린이 부른 ‘조조’란 곡입니다. ‘삼국지 연의’를 읽고 어찌 영웅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웅이라면 어찌 외로움을 모를 수 있겠는가, 라고 노래하고 있는데요. ‘삼국지 연의’는 14세기 중국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역사소설입니다.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 촉나라를 세운 유비와 오나라를 세운 손권, 한나라 말기의 승상으로 위나라의 기틀을 닦은 조조가 천하의 패권을 놓고 대결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용맹스런 장수들의 무용담과 치열한 지혜의 싸움이 수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조선시대부터 수백 년 동안 필독 도서로 널리 읽혀왔습니다.

인기 소설에는 반드시 악당이 나오기 마련인데요.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에서 그 악역은 조조가 맡았습니다.

“조조는 진궁과 함께 도망치던 중에 대대로 조조 집안과 교류가 있었던 성고의 여백사에게 들린다. 여백사는 크게 기뻐하며 환대하지만, 마침 집에 술이 떨어졌다며 밖으로 술을 사러 나간다. 여백사의 가족은 돼지를 잡아 대접하려고 칼을 가는데, 조조는 자기를 죽이려는 줄 알고 일가 여덟 명을 모두 살해한다. 그리고 마을에서 도망치다가 술을 사서 돌아오는 여백사를 만나자, 여백사마저 죽여버린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조조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대목인데요. 여백사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 죽인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진궁이 말하자, 조조는 “내가 세상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날 버리게 하진 않겠다”라고 답합니다. 이에 실망한 진궁이 조조를 떠난다고 나오는데요. 조조는 정말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었을까요?

//김운회 교수//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들을 말을 하자면 자기는 잘 때 자기도 모르게 남을 죽이는 경향이 있다, 습성이 있다 해가지고 시종이 이불을 덮어주려고 하니까 찔러 죽인다든가, 자기 아들하고 여자를 두고 경합을 하는 거라든가 등등 조조와 관련된 부분은 굉장히 나쁘게 묘사가 돼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사실이 아닙니다.”

삼국지 전문가 김운회 교수의 설명을 들으셨는데요. 김운회 교수는 나관중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악행은 대부분 과장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레이프 디크렙니 전 호주 국립대학교 교수 또한, 여기에 동의하는데요. 디크렙니 교수는 조조에게 잔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당시 시대적 상황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디크렙니 교수//
“가끔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고서 성공적인 제후가 되긴 어렵습니다. 조조가 전쟁에서 매우 잔인하게 행동했던 사례가 몇 번 있었는데요.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조조 같은 입장에 있고, 새로 나라를 세우려고 할 때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모욕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놔둬선 안 된다는 겁니다. 두려운 존재여야 하고, 존경을 받는 존재여야 하죠. 만약 누군가가 무례하게 군다면 큰 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211년 마초가 한수 등과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키자, 조조가 이를 진압하러 갔다가 크게 져 도망치게 된다. 그러던 중 ‘붉은 도포를 입은 사람이 조조다’란 소리를 듣자, 겁에 질려 말 위에서 붉은 도포를 벗어 던진다. 다시 ‘수염이 긴 사람이 조조다’라고 하니 놀라서 칼을 뽑아 수염을 자른다.’ 이번에는 ‘수염이 짧은 사람이 조조다’라고 하니 혼비백산해서 도망친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또 다른 일화인데요. 이처럼 나관중 삼국지는 대체로 조조를 경박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입니다.

//김운회 교수//
“적벽대전 당시에 어느 지역을 통과하면서 막 깔깔거리며 웃고 말이죠. 내가 제갈량이었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어쩌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까 관우가 나오고, 뭐가 나오고, 굉장히 경박스럽게 묘사가 됐는데 사실은 나관중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이미지란 것은 대개는 만들어진 겁니다.”

이를 보면 나관중 삼국지는 조조를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인 듯 한데요. 조조는 어쩌다가 악역을 맡게 됐을까요? 호주 국립 대학교 아시아학과 레이프 디크렙니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디크렙니 교수//
“조조가 죽은 뒤 조조의 적들, 당시 다른 두 나라가 있었잖아요. 조조의 적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조조는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나 보여줄 필요가 있었죠. 이 같은 현상은 송나라 때 더 심했는데요. 정통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송나라가 하늘로부터 위임을 받은 왕조라고 생각했거든요. 유비가 유 씨 성을 가진 한나라 왕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정통 후계자가 된 거죠. 정통 후계자와 유명한 각료 제갈량이 있으니, 악당이 있어야 하는데, 그 악당 역을 조조가 맡게 된 거죠.”

조조는 한나라 말기인 서기 155년에 태어났습니다. 조조의 아버지는 조숭인데요. 조숭은 원래 하후 씨인데 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하후 씨에서 조 씨로 성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조조는 황건족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는데요. 동탁이 죽은 뒤 헌제를 옹립해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사실 조조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고, 삼국지 전문가 김운회 교수는 말합니다.

//김운회 교수//
“예를 들면요. 진림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관도대전 당시에 진림이 조조를 쳐야 되는 격문을 써서 각지에 보내거든요. 여기에 보면 조조 자신에 대한 욕도 말도 못하겠지만, 자기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심하게 욕을 했습니다. 나중에 진림을 그대로 용서하고 굉장히 아껴서 다시 등용을 합니다. 이런 부분과 관도대전 당시에 적진을 점령하고 난 뒤에 기밀문서들을 다 보지 않고 다 태워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밀문서를 뒤져서 자신을 모함한 사람이나 배신자들을 색출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텐데요. 조조는 이를 모두 덮어둔 것입니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는 위서 무제기에서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일에 대처한 사람, 과거의 잘못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라고 조조를 평했습니다.

//김운회 교수//
“조조는 굉장히 실사구시적인 정신을 많이 갖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원소라든가 유비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좀 더 허세에 가까운 행위들이 많이 보이거든요. 그런데 조조는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생활도 굉장히 검약하고, 이 사람이 가장 중시한 게 뭐냐 하면, 인재 제일주의입니다. 인재를 굉장히 중시했기 때문에 이것이 조조의 성공의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조조는 또한 책 읽기를 좋아한 학구적인 사람이었고,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손자략해’ 등을 저술해 배포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조조의 가장 큰 업적은 둔전제를 실시한 것이라고 레이프 디크렙니 전 호주 국립대학교 교수는 말합니다.

//디크렙니 교수//
“조조가 매우 효율적으로 한 일이 둔전제입니다. 내전 때문에 떠돌아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현대적 의미에서 보면 난민이라고 할 수 있죠. 이들을 새 땅에 정착시키고 정부가 보호를 해준 겁니다. 이렇게 정착한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서 군대를 지원했죠. 또 내전 때 한나라 왕조가 완전히 무너진 거나 다름 없는데 조조가 안정을 시켰죠. 안정과 경제개혁이 조조의 업적입니다.”

“산은 높음을 싫어하지 않고 바다는 깊음을 싫어하지 않는다네.
주공은 진정으로 현사를 맞이하였기에 천하의 인심을 얻었다네.”

조조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읊은 ‘단가행’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인재를 갈망하는 마음과 공을 세우려는 웅대한 포부가 잘 드러나 있는 시인데요. 이처럼 조조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글로 표현했고요.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꼽혔습니다. 조조는 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도 불구하고, 시대의 간신이란 비판을 받고 있는데요. 조조는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통일했지만, 실제로 완전한 재통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 악인으로 남게 됐다고 디크렙니 교수는 주장합니다.

//디크렙니 교수//
“조조가 중국의 완전한 재통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조조가 하늘의 위임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조에게 뭔가 도덕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단점을 찾으려고 한 거죠. 만약 조조가 중국을 통일했더라면 굉장한 영웅으로 기록됐겠죠. ‘삼국지 연의’ 내용도 달라졌을 거고요. 그랬더라면 소설 재미는 좀 덜했을 겁니다.”

하지만 김운회 교수는 유비가 세운 촉나라나 손권이 세운 오나라는 면적 면에서 조조가 차지했던 영토와 비교가 안 된다며, 조조가 살아있을 때 이미 재통일이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김운회 교수//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조조가 통일을 못한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상 중국 전토를 통일을 한 것이죠. 물론 살아있을 때는 나라를 건국하진 못했지만 그 아들이 위나라를 건국을 하죠. 분열된 중국을 재통일한 위대한 제왕이라고 볼 수가 있죠.”

“천하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예법을 따를 수 없다. 나의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어라. 장병은 진영을 이탈해선 안 된다. 관리들도 제자리를 지켜라. 입관할 때는 평상복을 입히고 금은보화를 넣지 말라.”

서기 220년 초 임종을 맞은 조조가 측근들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평소 검약한 생활을 했던 조조는 장례를 간소히 치르고, 묘지를 호화롭게 꾸미지 말라고 당부했는데요. 도굴을 염려한 조조는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에 발견된 무덤이 과연 조조의 진짜 무덤이냐에 대해서 엇갈리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조조가 어지러운 시대를 평정한 세기의 영웅이자 한나라를 무너뜨린 간신이란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조조 무덤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란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중국 위나라의 기틀을 세운 조조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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