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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듣는 이야기 미국사 102] 1850년대 노예제도 문제


1850년 9월, 상원과 하원은 ‘1850년 타협안’의 전 부분을 승인했고, 필모어 대통령은 이 법안에 서명했다.

필모어 대통령이 ‘1850년 타협안’에 서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은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이 타협안은 북부와 남부의 위기를 해소하고 내전을 막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북부와 남부의 극단론자들은 더욱 격렬해졌다.

“타협안에서 도망 노예에 대한 부분은 명백히 헌법을 위반하는 결정입니다. 이 새 법은 도망 노예로 기소된 노예는 배심원단의 재판을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고, 정부 관리들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노예를 넘겨 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예들은 이런 결정에 대해 항소 조차 할 수 없게 돼있으니, 이건 분명 헌법 위반이죠.”

노예제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타협안에 대해 또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흑인 노예들의 헌법상의 권리 같은 건,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타협안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 흑인노예들을 원래 주인에게 반환시켜 주는, 하나의 단순한 법일 뿐입니다. ”

노예문제를 둘러싼 불화는1850년 타협안 이후에도 10여년동안 계속 쌓여갔다. 1850년 타협안은 미국의 노예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고, 사실상 그 문제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노예 문제는 밀라드 필모어 대통령이 재임 중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노예폐지론자들은 즉시,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키기를 원했지만, 백인과 흑인이 함께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최선의 해결책은, 노예들을 해방시킨 다음 그들을 고향인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예들을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자는 생각이 새로운 의견은 아니었다. 40여년 전, 일부 미국 지도자들은 이를 위해 ‘미국식민지협회’라는 하나의 조직을 결성했다. 1820년 실제로 이 협회는 흑인들을 다시 아프리카로 보내기 시작했고, 흑인들은 그곳에서 자체의 정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1847년, 이들은 자체 정부를 만들어 독립을 선언하고, 라이베리아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신생 라이베리아는 미합중국처럼, 헌법을 가진 나라가 됐다.

1854년. 미국에서 9천 여명의 흑인들이 다시 라이베리아로 돌아왔다. 이들 중에는 기술을 가진 흑인도 있었고, 철을 만드는 법과 증기기관 또는 다른 기계 사용법을 익힌 흑인도 있었다. ‘미국식민지협회’는 흑인들이 기술을 활용해 아프리카 국민의 삶을 개선해 나가기를 원했다. ‘미국식민지협회’의 계획은 가능하면 많은 흑인들을 비참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거였다. 이 협회는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흑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더 많은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돌려 보내고, 어떻게든 자유의 몸으로 고향에서 살게 해 주려고, 우리는 이렇게 애 를 쓰고 있는데, 일부 흑인들은 어떻게, 아프리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건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향에서 자유를 얻는 걸 거부하고, 미국에서 차별 받고 사는 게 좋다는 건지 원..” “우리 백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동안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 버렸으니, 사실상, 미국에서 자라난 흑인들에게는 미국이, 그들의 고향 아니겠습니까?” “세대가 바뀌었다고 더 이상, 아프리카가 고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다니, 거 참... “ 흑인 노예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자유를 찾아 나설 당시, 이들의 도주를 도운 것은 ‘지하철도’라는 조직이었다.

‘지하철도’는 실제 철도가 아니라, 북부로 도망치는 노예들을 몰래 돕는 사람들의 조직이었다. 도주 노예는 이 조직 회원드의 도움을 받아, 낮에는 숨어 지내다가, 밤이 되면 좀 더 북쪽으로 이동해 은신처로 옮겼다. 이 과정은 도주 노예가 뉴잉글랜드나 캐나다에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밤낮으로 되풀이 됐다.

1852년,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에서는 1850년 타협안이 주요 선거 쟁점으로 떠올랐다. 민주당은 볼티모어에서 대통령 후보 선거를 전당대회를 열고, 동북부 뉴햄프셔 주 출신의 프랭클린 피어스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휘그당 역시 볼티모어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고, 윈필드 스카트 장군을 후보로 내세웠다. 대통령 선거 운동은 약 5개월동안 계속됐고, 민주당의 피어스 후보가 휘그당의 스카트 장군을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예제 문제를 둘러싸고 북부와 남부가 전쟁에 돌입할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은 비교적 잠잠해 졌다. 재임 초기,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됐다.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사십 대의 젊은 대통령이었다. 피어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합중국의 영토 확장에 대해 강력한 지지와 외교 정책을 약속했다.

외교 정책면에서, 피어스 대통령은 영국과 협상해 캐나다 연안에서 미국의 어로권을 얻어 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스페인으로부터 쿠바를 매입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피어스 대통령은 미합중국 주들 가운데 어디에 철도를 새로 부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미국이 점차 팽창하고 백인 이주자들이 서부로 몰려 들면서, 미국인들은 적절한 수송 수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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