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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관동 대지진 당시 한인 대학살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지난 9일 한국 경기도 시흥에서 리히터 규모 3.0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상점의 물건들이 흐트러질 정도로 충격이 강했고, 건물과 유리창이 흔들리는 바람에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다행히 한반도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할 만큼 큰 지진이 일어난 일이 없었는데요. 아마도 한인들의 인명피해가 가장 컸던 지진은 1923년에 일본에서 발생한 관동 대지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진 발생 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수천 명의 한인들이 일본인들에게 학살당했기 때문인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관동 대지진 당시에 발생한 한인 학살 사건을 들여다 보겠습니다.

1923년 일본 관동지방을 흔든 대지진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외교관과 기업인 등 미국인 2백 명을 포함해서 상당수의 외국인들도 목숨을 잃었는데요. 하지만 이 때 가장 많이 숨진 외국인은 조선인, 바로 한인들이었습니다.

//강덕상 교수//
“상해 임시정부에서 조사한 결과가 6천 6백 명……. 이건 상해 임시정부에서 사람을 파견해가지고, 여기에 살아있었던 학생들하고 같이 조사를 해서 보고서를 냈습니다.”

일본 시가 현립대학 명예교수인 강덕상 교수는 관동 대지진 발생 당시 6천6백 명의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는데요. 하지만 이는 지진으로 인해서 사망한 한인들의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한인이란 이유로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람들의 숫자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절간 마루 아래 몸을 감추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람들에게 들키면 죽임을 당하게 될 테니 살려달라며 애원했다. 그 때 밖에서 사람들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선인이 묘지 쪽으로 들어갔다며 잡아서 죽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자경단원들의 발자국 소리가 절간 안으로 들어왔다……그리고 끔직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노엘 부쉬의 ‘12시 2분전’ 중에서)

네, 노엘 부쉬 전 ‘라이프’ 잡지 편집인이 쓴 ‘12시 2분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일본의 관동 대지진을 소재로 한 책 ‘12시 2분전’은 당시 한인 학살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의 증언을 이렇게 전하고 있는데요. 관동 대지진 당시에 이 같은 한인 학살 사건이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해머 씨//
“직접적인 원인은 지진이 발생한 직후에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인들, 즉 조선인들이 지진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봉기한다는 소문이었는데요. 우물에 독을 타고, 지진에서 살아남은 일본인들을 살해한다는 유언비어가 확산된 겁니다. 사람들이 의혹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가운데, 이런 소문들이 순식간에 퍼진 거죠.”

관동 대지진을 소재로 한 ‘불타는 요코하마’란 책의 저자인 조슈아 해머 씨의 설명을 들으셨는데요. 이 같은 소문은 지진이 발생한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지진이 발생한 지 사흘 뒤인 9월 4일에는 일본 북부 홋카이도까지 소문이 퍼졌다고 하니까요. 얼마나 빠른 속도로 소문이 퍼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강덕상 교수//
“조선은 경계를 해야 된다 해가지고 유언비어가 나왔죠. 조선인은 불을 지른다, 샘물에 독을 넣는다, 방화를 한다, 폭탄을 던진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는 한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1910년의 한일병합 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한인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는데요.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고, 1923년 1월에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일본인들은 한인들에게 언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갖고 있었습니다. 조슈아 해머 씨의 설명입니다.

//해머 씨//
“당시 한반도에서 기회를 박탈당한 한인들이 일본 고용시장에 많이 진출해 있었거든요. 한인들이 싼 값에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일본인들의 일자리를 앗아간다는 인식이 일본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습니다.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수만 명의 한인들이 관동지방에 살고 있었는데요.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인들이 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겁니다.”

대지진과 화재로 인한 혼란 속에 치안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일본 군은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한 강덕상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강덕상 교수//
“계엄령을 했고, 군대가 최고 권력을 갖게 되는 명령입니다. 그걸 발표해서, 적은 조선인이다, 군대 출동했죠, 경찰이 무너지고, 경찰이 경비력이 없게 돼서, 이럴 때 조선인이 봉기를 하면 큰일이다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반 시민들은 스스로 마을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자경단을 조직했습니다. 이들 자경단원들은 불령선인, 그러니까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들을 처벌한다며, 무고한 한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는데요. 광기에 휩싸인 일본인들은 수백 명의 한인들을 한꺼번에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요코하마 항에서 일하던 미국인 헤드스트롬 선장은 손과 발이 묶인 한인 2백50명이 산채로 화형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뉴욕 타임즈 신문에 증언했고요. 요코하마 하치만 다리에서 한인 1백여 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했다는 목격자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도쿄로 가는 길에 우리는 자경단원들 때문에 여러 번 차를 세워야 했다. 이들은 칼과 죽창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이었는데 매우 흥분한 모습이었다……한번은 이들 자경단원들이 우리 운전기사를 가리켜 한인이라고 소리치면서 끌어내려고 했다. 다행히 자경단원들 가운데 한 명이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운전기사는 즉석에서 살해당할 위기를 모면했다.” (조슈아 해머 ‘불타는 요코하마’ 중에서)

조슈아 해머 씨의 저서 ‘불타는 요코하마’에 실린 미국인들의 증언이었습니다. 이처럼 한인이라고 의심되는 자는 무조건 죽이고 보는 분위기 속에서, 중국인이나 다른 지방 출신 일본인들이 살해당하기도 했다고 강덕상 교수는 전합니다.

//강덕상 교수//
“거리에 사람이 지나가면 경찰이나 일반 시민이 ‘쥬엔 고주셍’, 이거 일본 말입니다, 이거…… 이걸 통행하는 사람한테 질문을 합니다. ‘쥬엔 고주셍’을 잘 발음할 수 없는 사람은 다 조선인이라고 해서 거기서 막 죽였습니다.”

강덕상 교수를 비롯해 당시 학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많은 한인들은 이 사건이 일본 군에 의해 계획적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재일 한인 정종석 씨의 얘기를 들어보시죠.

//정종석 씨//
“도쿄에서는 군대가, 경찰이 허위 선전을 인위적으로 퍼뜨렸어요. 3.1 운동 한 후 2,3년 뒤 아닙니까? 그걸 계속 항일 독립운동에 그거 될 까봐 이 시기를 타서 지진 이 때 진압을 시켜놔야 되겠다, 이래서 허위 선전을 한 거죠. 이거 터무니 없는 소리입니다.”

‘불타는 요코하마’의 저자인 조슈아 해머 씨는 이와 관련해 좀 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해머 씨//
“그 문제는 그 동안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안개 속에 쌓여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군이 상당히 느리게 대응했던 건 사실이죠. 또 일본군이나 경찰 일부가 계획적으로 한인 학살에 가담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아무도 한인 학살 행위, 조선인 학살 행위를 막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외국에 안 좋은 인상을 준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학살 행위를 중단하라고 명령을 내렸죠. 당시 사건이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에 의한 것이었느냐, 이 점은 확실치 않습니다만 학살 행위에 가담한 지휘관이나 경찰은 많았습니다.”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큰 지진으로 인한 충격과 분노 속에 한인들을 표적으로 삼아 학살 행위를 자행했지만,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 선량한 일본인들도 많았습니다. 재일 한인 정종석 씨는 1923년 7월에 도쿄로 건너왔던 부친이 그 해 9월에 대지진을 만나 학살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일본인 공장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전합니다.

//정종석 씨//
“공장 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공장의 공장장을 하던 일본 분이 계셔가지고, 그 분이 목숨을 건져준 겁니다. 위험한 상태를 알고 공장의 젊은 사람들 보호를 시켜가지고 경찰까지 데려간 거죠.”

정종석 씨의 부친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경찰서에 보호를 요청했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한 한인들도 있었습니다. 관동 대지진 한인 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민간 단체 상임대표인 김종수 목사는 일본 사이타마 군마 지역에는 당시 경찰서에 보호를 요청했다가 학살 당한 두 한인의 묘비가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김종수 목사//
“이 분들은 자경단이 죽이려고 몰려 오니까, 무서워서 경찰에 보호를 요청했어요. 경찰서에 숨어 있었는데, 일본 자경단들이 경찰서 앞에서 막 시위, 데모를 하면서 조선인을 끌어내라 그렇지 않으면 경찰서를 부숴버리겠다 라고 협박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조선인을 바깥으로 내보내 줬어요,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학살 당한 거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찰들이 그 당시 상황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이 이 사람들 묘비를 만들어 줬어요. 이 분들은 순순히 자발적으로 경찰을 찾아갔던 사람들이고, 일본 경찰이 조선인들을 보호한다고 보호관찰소에 데려간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분리를 해서 이 사람들을 다 자경단한테 10명, 20명씩 내줬어요, 학살하라고…….”

이처럼 무고한 한인들이 수천 명씩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사건은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며, 학살 당한 사람들의 숫자도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입니다. ‘불타는 요코하마’의 저자 조슈아 해머 씨입니다.

//해머 씨//
일본은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체포하긴 했지만 무거운 형량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금방 사면됐죠. 지진 발생 후 1주일 동안 수천 명의 한인들이 학살됐는데 큰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던 겁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같은 조선인 학살사건으로 인해 14년 뒤의 난징 대학살과 같은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계엄령을 통해 일본 군이 권력을 강화하고, 군국주의로 무장하는 계기가 됐고요. 한인 학살 사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무사했기 때문에, 이후 전쟁에서 일본인들이 더욱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1923년의 관동 대지진 당시에 발생한 한인 학살 사건에 관해 전해 드렸습니다. 다음 주 이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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