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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화폐의 역사 (2)


안녕하세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시간의 부지영입니다. 지난해 말 북한이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과 관련해 지난 주부터 화폐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직 화폐가 생겨나기 전 인간은 가족끼리, 또는 친지끼리, 물건과 물건을 맞바꾸는 식으로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개 껍질이나 카카오 씨, 금이나 은 등의 귀금속을 화폐로 사용하기 시작했고요.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서는 에게 해 연안의 고대 왕국 리디아에서 서양 최초로 동전이 만들어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변국들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주화 사용이 널리 퍼지게 되는데요.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오늘은 로마 시대 화폐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세력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고, 외부의 위협에도 취약한 상태였다. 기원전 390년 북쪽에서 갈리아 족이 밀고 내려오자, 로마 시민들은 유노 여신의 신전이 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피신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갈리아 병사들은 로마인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을 틈타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마저 졸음에 빠진 가운데, 로마 인들은 갈리아 군대의 공격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유노 여신 신전의 성스러운 거위들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네, 거위 울음소리에 깨어난 로마인들이 갈리아 병사들에 맞서 싸우면서 도시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전설이 로마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요. 로마인들은 유노 여신의 도움으로 갈리아 족을 물리칠 수 있었다며, 그 때부터 유노 여신을 ‘경고하는 자’란 의미를 가진 ‘유노 모네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돈, 화폐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머니 (money)’는 바로 이 ‘모네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웨더포드 박사//
“머니란 말은 로마 여신의 이름에서 나왔습니다. 원래 공식적인 이름은 유노인데요. 유노 여신의 거위들이 꽥꽥거리며 울어서 갈리아 족의 공격으로부터 로마를 구했다고 하죠. 그 때부터 유노 여신을 ‘유노 모네타’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요. ‘경고하는 자, 유노’란 뜻입니다. 유노 여신의 신전에서 로마의 첫 동전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노 여신의 이름을 본 따서 화폐를 ‘모네타’라고 부르게 됐죠.”

맥칼래스터 대학 인류학과 교수를 지냈고 ‘돈의 역사 (History of Money)’란 책의 저자이기도 한 잭 웨더포드 박사의 설명이었습니다. 유노 여신의 신전에서 주조된 로마 주화에는 유노 여신의 모습과 함께 ‘모네타’란 말이 새겨져 있었는데요. 로마인들이 신전에서 화폐를 주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웨더포드 박사//
“화폐를 신성한 것이라고 여겼거든요. 특히 금은 태양, 은은 달과 연관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 화폐를 주조했던 거죠. 조폐소, 즉 화폐를 주조하는 곳을 영어로 ‘민트 (mint)’라고 하는데요. 이 말 역시 ‘유노 모네타’의 ‘모네타’에서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원전 3세기 로마인들은 유노 여신의 신전에서 첫 은화 ‘데나리우스’를 주조했고요. 기원전 1세기부터는 금화 아우레우스를 만들었습니다. 초기 화폐는 여러 신들의 모습과 같은 종교적인 문양이 대부분이었지만, 종신 독재관을 지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시작으로 권력자나 황제의 모습이 동전에 등장합니다.

//웨더포드 박사//
“그 전에는 동전의 문양이 대부분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동전은 신전에서 만들어졌고, 신성한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는 황제들 역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황제의 얼굴을 동전에 새기게 됐습니다.”

서기 1세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 화폐 제도를 확립한 이후, 황제마다 자신의 모습을 주화에 새겨 넣는 화폐문화가 생겨났습니다. 황제뿐만 아니라, 황제의 가족이나 후계자의 모습을 새긴 주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원활한 권력 승계를 돕고, 후계자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로마 제국의 동전은 훌륭한 선전도구 역할도 했습니다.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로마 제국의 주민이란 사실을 일깨워줬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동전 하나를 가져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그들이 가져왔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카이사르의 것이나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시다.”

네.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2천여 년 전, 기독교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숭상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었을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요. 신약성서에 동전이 여러 차례 언급된 것을 보면 당시 로마 동전이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웨더포드 박사//
“로마는 화폐에 기반을 둔 최초의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을 운영하는데 화폐를 사용한 거죠. 예를 들어 병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했는데요. 매우 획기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보통 전쟁 때 병사들은 약탈한 보물을 조금 가져가도록 허용 받는 게 전부였거든요. 봉급을 받는 경우는 드물었죠. 하지만 로마 제국은 화폐의 거래에 기반을 뒀어요. 정부가 돈에 기반을 두고 운영된 거죠.”

웨더포드 박사의 설명을 들으셨는데요.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정부 관리들도 봉급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공화정 시대에는 무료로 봉사하던 관리들이 기원전 30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돈을 받고 일하게 된 것입니다. 병사들 숫자만큼은 아니지만 관료주의가 심화되면서 정부의 녹을 받는 관리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요. 정부 재정이 궁핍해지기 시작했는데요. 계속되는 전쟁과 병사들의 봉급이 가장 큰 부담이었지만, 로마 인들이 동양의 사치품을 지나치게 좋아한 탓도 있었습니다.

“일찍이 티베리우스 황제는 로마의 부가 외국으로 새나가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로마의 금과 은이 심지어 적국으로까지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서기 77년 로마의 플리니우스 장로는 한 해 5억5천만 개 이상의 구리 동전이 사치품 수입으로 인해 인도로 흘러가고 있다고 불평했다.”

바로 이 때부터 서양과 동양의 무역 불균형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로마인들은 홍차와 같은 아시아의 차와 비단에 열광했지만, 금과 은 외에는 달리 줄 것이 없었습니다. 아시아인들의 흥미를 끌만한 물건을 생산하지 못했던 건데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로마 제국 황제들은 갖가지 방안을 강구했고요. 급기야 네로 황제는 화폐를 조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웨더포드 박사//
“서기 69년경 네로 황제 때 로마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습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화를 회수해서, 이를 녹여 새 주화를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원래 은화보다 은의 양이 7분의 1 적은 동전을 만들면, 더 많은 돈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은화 한 개에 들어있는 은의 양을 줄인 것인데요. 과거 은 한 덩어리로 은화 84개를 만들었다면, 같은 양으로 96개를 찍어냈던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15 퍼센트 이상의 이득을 얻은 네로 황제는 금화도 마찬가지로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금 한 덩어리로 금화 40개를 만들었는데, 금화 한 개 당 금의 양을 조금씩 줄여서 45개씩 만들었던 겁니다. 네로 황제에 뒤이어 다른 황제들도 이를 따랐습니다.

“서기 2세기 중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이르자 로마 은화는 은의 양이 원래 은화의 75 퍼센트, 2세기말 코모두스 황제 시절에 이르러서는 67 퍼센트에 불과하게 됐다. 3세기 초 루시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병사들의 봉급을 인상하면서, 은화 한 개당 은 함유량을 50 퍼센트 미만으로 줄여야 했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계속 물가가 오르고, 로마 화폐는 가치를 상실하게 됐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서는 화폐 주조가 중단되기에 이르렀는데요. 금화 역시 액면가는 무시되고, 무게에 따라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이 같은 로마 화폐의 몰락은 결국 로마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고, 중세 봉건제도의 발달을 가져왔다고, 인류학자 웨더포드 교수는 설명합니다.

//웨더포드 박사//
“물가가 치솟았고요. 황제들이 물가를 안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죠. 곧 시장이 붕괴하고, 봉건제도가 나오게 됐는데요. 봉건제도는 시장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고립된 장원에 기반을 둔 것이잖아요? 로마 제국의 멸망은 통화에 기반을 둔 최초의 제국이 멸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요. 서기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게르만족 장군 오도아세르에 의해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합니다. 이와 더불어 서유럽의 통화제도 역시 무너지게 되는데요. 도시 중심에서 지방 중심으로, 화폐를 기반으로 한 상업 중심의 사회에서 자급자족 사회로 변모하게 됩니다.

//웨더포드 박사//
“봉건제도는 공물에 기반을 둔 제도였죠. 농민 위에 영주가 있고, 또 그 영주 위에 더 높은 영주가 있고 말이죠. 계급에 따라 물건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폐가 아주 없어진 건 아닙니다. 서유럽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에서는 아직 화폐 제도가 견실했으니까요. 비잔틴 제국의 화폐와 다른 지역의 화폐가 서유럽에 흘러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럽에서는 화폐 제조가 중단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서유럽의 통화 공백기간은 거의 1천 년 동안 계속되는데요. 중세 십자군 전쟁시대에 이르러서야 서유럽에서 화폐 제도가 되살아나게 됩니다. ‘돈의 역사’란 책의 저자인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 교수의 설명입니다.

//웨더포드 박사//
“대규모 군대가 중동으로 갔기 때문인데요. 중동에서는 계속 화폐가 사용되고 있었거든요. 십자군 전쟁에 나간 군대가 막대한 양의 보물과 화폐를 갖고 돌아왔죠. 그래서 한 동안 ‘성전기사단’이라고 불리는 종교단체가 화폐의 이동과 유럽 전역의 부를 관리했습니다. 일종의 은행 역할을 했던 거죠.”

‘호기심으로 배우는 역사’, 다음 시간에도 화폐의 역사에 관한 얘기 계속해서 보내드립니다. 다음 시간도 기대해 주시고요. 저는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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